[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아직 10월이건만 바람이 찼다. 주말답지 않게 이른 시각에 눈을 뜬 나는 한동안 무얼 입어야 후회하지 않을지를 놓고 고민해야만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애오개역. 평소 갈 일이 전혀 없는 지역이다 보니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어디서 무얼 어떻게 타야 닿을 수 있는지, 모든 게 낯설었다. 모르겠다 싶을 땐 무조건 일찍 출발한다. 8시도 되기 전에 발걸음을 재촉했더니 과히 이른 시점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전날 동선을 대강 머릿속에 그려보며 하루에 과연 소화 가능한 거리인가 의문을 품었다. 만만찮은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든든히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그렇게 주어진 여유 시간을 보낸 후에 애오개역에서 지난주에 이어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했다.

예전에도 두어 차례 걸은 바 있는 지역이다. 처음에는 그 사실조차 망각한 상태였으나 마포대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눈에 익은 광경들이 펼쳐졌다. 언제나 새로움을 표방하는 편이나 듣기가 무섭게 잊어버리는 습성을 지녔으므로 여러 차례 반복해 듣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과연 오늘 들은 내용 중 난 얼마나 소화를 시켰을지. 답사 일정을 마무리 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임에도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난 내 기억을 확신 못 하겠다. 정확성이 떨어진다 하여 기록을 회피하면 훗날 아무것도 내게 남지 않는다. 강박에 사로잡히고 싶진 않지만 매 순간 무언가를 끄적이려 안달하는 까닭이다.

거센 바람에 으슬으슬함을 느끼며 걸은 거리의 상당 부분이 마포대로였다. 마포구에서 어쩌면 가장 드넓은, 적어도 이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도로일 테지만, 한 때 이곳은 '리야드(Riyadh) 로'가 될 뻔 했다. 지금도 석유에의 의존도가 상당할 텐데, 아직 대체 에너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1990년대에는 이 연로를 확보 못하면 경제가 휘청거릴 거라는 위기의식이 상당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Teheran)의 명칭이 고스란히 강남에 이식된 것 역시 경제 논리를 철저히 따른 결과였다. 마포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마포'라는 이름을 포기하는 건 곧 정체성의 포기와도 같았을 것이다. 만일 이 일대가 리야드로가 됐더라면 어땠을까 잠시 상상을 해 보았다. 리야드로의 교통 체증이 어마어마하다? 리야드로를 달리는 버스를 이용해 매일 등교를 했다?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왠지 한강이라는 명칭도 '다리우스 리버' 같은 걸로 바꿔야만 할 거 같다. 다 지난 일이다. 가벼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

갈 길이 멀기도 했거니와 서 있던 장소가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현장이라는 점도 적잖이 신경 쓰였다. 서둘러 다음 장소인 한국정교회 성니콜라스 대성당으로 이동했다. 지난 번 이용했던 출입구가 굳게 닫혀 있어 살짝 당황했다. 코로나19 이후 대중에게 문을 열지 않는 공간이 급증했는데, 혹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신부님께서는 나의 걱정과는 반대로 오랜만에 찾아온 방문객들을 무척이나 반기셨다.

첫 성찬 예배가 거행된 게 1900년의 일이니 한국정교회의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겼다. 그럼에도 들을 적마다 새롭고 난해하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평소 자주 접하지 못해서가 아닐지 싶다. 지금은 엄연히 한국 땅에 뿌리내렸으나 초반의 한국정교회는 러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물러가면서 사역이 제대로 행해지기 힘들어졌다. 러시아 본토가 혁명으로 불타 오른 후에는 더더욱 이 먼 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 것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응의 기회를 부여 받았다. 유엔군을 따라 온 그리스 군종에 의해 그리스 정교회의 도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이 물러가고 아현동에 새로이 교회 부지를 마련한 후로는 이전보다 모든 게 훨씬 수월해졌다. 현재 볼 수 있는 성당 건물은 1968년에 지어졌다. 건물의 머릿돌에는 1968년 5월 19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 모양을 띠고 있으며, 내부 구조는 박해를 피해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드렸던 카타콤베와 닮은꼴이라고 하였다. 드론을 띄워 살필 수 없는 입장인지라 머릿속에 그 모양이 잘 그려지진 않았다. 금빛을 뽐내며 날 내려다 보고 계신 니콜라스 성인의 성화로 대신 시선이 쏠렸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여느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성화로 가득한 내부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방교회와는 확실히 달랐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나 알렉산드리아, 혹은 안티오키아(안타키아)를 방문하면 이와 같은 건물을 손쉽게 접할 수 있으려나. 오늘날 이들 도시는 모두 이슬람 국가의 영향 하에 놓여 있다. 동방교회가 큰 힘을 떨쳤던 또 하나의 도시 예루살렘 또한 전적으로 기독 문명의 통치를 받고 있다고 보긴 힘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종교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설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른 탓일까. 태초의 목적은 상실한 채 표류했던 십자군 운동이 순간 떠올랐다.

뿌리는 로마 교회로 동일하나 갈린 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서방, 동방 교회의 차이는 은근히 커 보였다. 독특하게도 정교회의 목회자는 예배 참가자들과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린다고 하였다. 예배 시에 성소 앞 구조물의 중앙 부분만이 열린다는 점도 그랬다. 전통에 최소한의 변형만을 기하며 비교적 옛 모습을 유지 중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각지에 도입된 정교회는 토착화에 굉장히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온 듯했다. 슬라브 지역의 경우, 그리스 선교사가 종교를 보급하면서 이 지역에 없었던 문자도 만들어 보급했는데, 그로 인해 그리스어와 매우 닮은 글자(키릴문자)가 이 지역에 도입됐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성당 건물을 빠져나왔다. 공덕동이었나, 주민자치회 분들이 몰려 와 성당을 둘러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답사의 시간 대부분을 정교회 학습에 할애했을 것 같다.

볕을 만나면 사르르 몸이 녹았다. 허나 이내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얼어붙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양옆으로 들어찬 높다란 빌딩이 왠지 모를 위압감을 선사했다. 지은 죄가 많아서일까.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앞에 서니 갑자기 내 자신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검찰청이 들어선 위치는 오래 전 감옥 터였다. 우리나라의 근대식 감옥이 들어선 건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때의 일이다.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가 모조리 일제 소관으로 넘어가고야 말았던 것이다. 일제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을 터인데, 이후 발휘한 악랄함이 상상 이상이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했다. 1908년 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자리에 경성 감옥이 들어섰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을 잡아 들였으면 1912년에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또 다른 감옥이 필요해졌다고 한다.

넘치는 수요를 감당하고자 현 자리에 감옥을 하나 더 만들어 경성 감윽으로 명명하고, 서대문에 있는 감옥은 서대문 감옥으로 칭했다고 하였다. 1926년 감옥이라는 명칭이 형무소로 변경되었으며, 해방 후 마포 형무소로 불리던 것이 다시 한 번 '교도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후 안양으로 교도소가 이전함에 따라 비어 있던 공간의 일부에 경서 중학교가 들어섰으나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형성된 강서구 가양동 쪽으로 학교는 옮겨 갔고, 1995년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최남선, 한용운, 오세창 등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수감돼 있었던 경성 감옥은 서대문 형무소와 달리 옛 사진을 찾기가 힘들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양을 띠고 있었는지 파악이 힘들다고 했다. 서대문 형무소가 지닌, 망루에 올라서면 모든 제소자의 감시가 용이한 파놉티콘 구조와 아마도 비슷한 모양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편 시인 김광섭의 '나의 옥창일기'에는 부실한 배식으로 인해 벌어졌던 소동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제소자들의 항의에 폭력으로 응한 일제 탓에 3명이 죽고 5명은 뼈가 부러지고. 그러잖아도 날이 찬데, 끔찍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몸이 본능적으로 떨렸다. 일제는 죽은 자가 병으로 사망했다고 허위로 신고함으로써 제 폭력을 은폐하려 들었다. 저항은 끊이지 않았으나 모든 게 애초부터 열세였던 제소자들이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을 것이다.

학창 시절 우스개 이야기로 접했던 학교 화장실 귀신 이야기도 나눴다. 우리는 대대로 농경사회였다. 너른 평지는 대개 농사를 짓는데 사용했으므로 죽은 자의 시신은 산에 묻었다. 일제 지배하에 화장 문화가 도입돼 과거 같았으면 무덤으로 사용치 않았을 공간도 죽은 자들이 점거(?)하기 시작했다.

서울 소의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아현리 화장장이 있었고, 서울 고은 초등학교 또한 홍제 화장장이 있던 곳에 터를 잡았다. 아마 적잖은 학교가 이런 식일 것이다. 아무리 사정이 그러하더라도 비가 올 때마다 화장실에서 손이 주욱 튀어 나와서는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를 외쳤다는 이야기는 터무니없지 싶다. 부실 공사가 아니고서야 엄연한 실내인 화장실에 거주(?)하는 귀신들이 비가 오는 걸 알아챌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다른 특색이 없어 보이는 건물을 마주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 현재는 마포SK허브블루 오피스텔로 불리고 있으나 예전에는 신민당사 건물이 대각선에 있었다. 신민당사 건물은 원래 인사동 쪽에 있었다. 국회 주변에는 각 당 사무실이 대거 밀집하기 마련인데, 당시 국회는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을 사용했다. 참고로 국회는 1975년 여의도에 자리를 잡았다. 국가기록원 사이트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국회의 위치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화했다. 당시 사회의 혼란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사당은 서울 세종로 중앙청이었다. 이곳에서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는데, 제헌국회는 광복 후 국제연합(UN)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구성된 국회를 말한다. 이때 중앙청이 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임시수도였던 대구 문화극장이 임시의사당 역할을 했다. 그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산 문화극장, 서울 종로구 중앙청, 서울 중구 시민회관별관, 부산 부산극장, 경남도청 무덕전 등 전쟁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곳이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서울로 환도한 국회는 중앙청 중앙홀,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 대한공론사를 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1975년 9월 1일에 현재의 여의도 의사당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국가기록원>

신민당사 건물은 국회가 여의도로 이동함에 따라 마포로 옮겨왔다. 완공 직후 있은 신민당 전당대회는 김영삼의 승리로 마무리됐으며, 8월 YH 무역사건이 같은 장소에 발생하면서 역사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방향으로 흘러가고야 말았다. 'YH무역'은 가발 수출업체로, 제조업 중심의 우리나라 경제 구조를 지탱했던 대표적 기업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했으며, 급기야 사장이라는 이는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 않은 채 회사를 폐업하고야 말았다.

신민당사를 농성 장소로 택한 사람들은 그래도 여당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1천명이 넘는 경찰에 의해 행해진 무력 진압으로부터 그들은 안전하지 못했다. 김경숙 열사(당시 21세)의 추락사는 폭력적이었던 진압에 대한 짐작을 가능케 한다. 바로 옆 신라스테이 마포 건물에는 한마음병원이 있었다. 추락한 김경숙 열사의 주검이 실려간 병원이기도 하다. YH무역 사건은 김영삼 의원 제명 – 부마 항쟁 – 10.26 사태 - 서울의 봄 –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의 시발점이었다. 지금의 모습으로부터 격동의 시기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흐르는 시간을 멎게 만들 순 없다지만 시간이 품은 이야기마저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 절로 섰다.

경의선 철로의 흔적도 엿볼 수 있었다. 러일전쟁의 수행을 위해, 군사적 필요에서 일제는 경의선 철로를 설치했다. 기차는 평양, 의주까지 나아갈 수 있었는데, 출발 지점이 서대문역이다 보니 바로 북쪽으로 올라가는 형태가 아니라 삼각지역 쪽으로 내려왔다 가야 했다. 지금이라면 무악재 쪽을 뚫어 직전 철로를 만들었을 테지만 당대의 기술력으로는 힘이 들었던지 1920년도에 일제는 아현 터널을 뚫었다. 더는 기차가 달리지 않는 철로 일대는 현재 공원으로 변신했다. 일명 연트럴 파크로 불리며 젊은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먹자골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식점이 즐비한 길을 따라 걸었다. 마포 삼성 아파트 단지 앞에 놓인 안내판은 상태가 안 좋았다. 지난날 내린 비를 고스란히 머금어 글씨를 읽기가 힘들었다. 이 일대가 과거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려 주는 소중한 기록이 이렇게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속상했다.

한강이 가까이에 있으니 아파트 가격이 상당할 듯했다. 게다가 삼성에서 지은 아파트다. 숨만 쉬며 몇 십 년을 일해도 이곳에 아파트를 장만하지는 못할 것이다. 약간의 씁쓸한 감정이 일려는 찰나에 들은 이 장소에 얽힌 옛 이야기가 나의 기분을 한결 풀어 주었다.

일제시대에 이곳에서 죄수들은 벽돌 굽는 노역에 종사했다. 그들이 만든 벽돌 다수가 조선총독부 건물의 재료로 사용됐다. 노역 중이던 죄수의 탈옥에 따른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었다. 간수복을 훔쳐 입고 달아난 죄수의 행보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조용히 숨어 지냈으면 영원한 자유의 쟁취에 성공했을 듯도 한데, 잡범 특유의 DNA를 못 버리고 자전거를 탈취해 판매하고 흥청망청 유희에 돈을 쓰며 떠돈 끝에 붙잡히고야 말았다. 1934년 9월 4일자 동아일보는 죄수의 체포 소식과 함께 공개한 그간의 동선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마포 아파트가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아니다. 아파트의 최대 장점은 단지 내에서 대부분의 욕구 해소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곳 마포에는 단지 형태의 아파트가 처음으로 들어섰다. 그 시절 지었던 아파트는 91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 존재하는 마포 삼성 아파트 단지는 95년 들어섰다. 재건축을 위해 꾸린 조합 중 1호라고 했다. 이 역시도 하나의 역사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는 끊임없이 쓰여 지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좌측으로 뻗은 길을 택했다. 마포종점 노래 가사가 새겨진 비를 만났고, 가파른 언덕을 따라 오른 후 펼쳐지는 한강 뷰를 즐겼다. 이번에는 경로를 달리했다. 우회전 후 나타난 도로의 명칭은 토정로였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다 했더니 '토정비결'의 그 '토정'이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마포 나루에 자기가 사는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해서 정자를 지었다. 역사가 이를 기록하고 있으므로 마포구에서는 이를 기리고자 해당 도로에 동상을 세웠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는 선생의 집터가 있으며,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비석 또한 놓여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공공 조형물이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는 거대한 형태를 자랑하는데 반해 이곳의 조형물은 실제 인물의 크기와 흡사했고, 세부적인 디테일도 살아 있었다. 소금을 얻기 위해 줄을 선 민중의 모습치고는 잘 먹은 흔적이 역력(?)하다는 거 정도가 굳이 꼽으라면 아쉬움으로 언급할 만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1517년 태어나 1578년 사망했다. 그는 정통 성리학자였다. 고려말의 성리학자 이색의 7대손인 그는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 하였다. 그런 그가 국가의 부를 증진하여 백성을 배불리 먹이자는 다분히 실용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한 점은 다소 의외로 여겨졌다. 심화된 당쟁을 피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그는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포천현감 자리에 응했다. 그곳에서 비루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했다. 가난 타파를 위해 타 지역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상소를 조정에 올렸으나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다시 한 번 아산현감에 임명돼 걸인청을 설치하는 등 선정을 펼치고자 애썼지만 부임 3개월만에 이질에 걸려 사망했기에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존재로 기억한다. 그가 저술했다는 토정비결 탓이 크다. 16세기 인물인 그가 남긴 저서가 널리 읽힌 건 순조 때다. 200년의 간극을 설명할 길이 요원하다 보니 최근에는 토정비결의 저자가 다른 사람이라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사실 여부는 아직 알 길 없으나 그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강이 빤히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마포 나루터. 몇몇 공간의 경우 오로지 지명만이 남아 있을 뿐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진 광경 탓에 상상조차 버거운데 반해 이곳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있어 옛 모습의 짐작이 쉬웠다. 아무리 신분 사회였고 상업을 천대하였더라도 누군가는 먹고 살기 위해 거래에 나서야 마땅했다. 귀하디귀한 소금을 비롯하여 새우젓, 각종 곡물 등이 오고 갔을 장소는 이제 시원스레 강바람을 맞으며 페달을 밟는 자전거 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잠시 펼쳐든 김정호 선생의 ‘경조 5부도’를 보니 서울에는 하천이 참으로 많았다. 중랑천, 우이천, 홍제천,... 저마다 알게 모르게 품고 있는 이야기가 넘칠 것이다.

한강 주변의 경우, 조선 초기부터 나루터가 형성됐다.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한강진 등의 명칭은 오늘날에도 우리 사이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마포’라는 지명 또한 ‘삼개나루’라는 옛 명칭에서 탄생했다. 삼개라 했을 때 숫자 3을 먼저 떠올렸는데, 삼베, 모시 할 때의 그 삼이라고 하였다. 한문을 모르는 게 사는데 극심한 지장을 초래하진 않지만, 남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모른다 싶을 때면 내 삶이 타인의 그것보다 왠지 덜 풍성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세상이기에.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지금의 한강이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탄생했음은 일전에도 몇 차례 들은 내용에 있어 알고 있었다. 모래 바닥이 드러나고, 마치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형태를 자랑하는 한강도 나름 멋스러웠을 것이다. 현재는 선인들이 낭만과 풍류를 즐겼다는 동호(두무포), 서호(서강), 남호(용산강) 등을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내야만 한다.

상업을 통해 성장한 신흥 부유층의 흔적은 그나마 좀 찾아볼 수 있었다. 시간에 쫓겨 미처 닿지 못한 부군당이 광흥창역 주변에 여전히 존재했다. 원래의 위치는 밤섬이었으나, 필요에 의해 섬을 폭파하면서 부군당 또한 창전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인근에 공민왕을 모신 사당도 있는 걸로 보아 나름 기도빨(!)이 서는 지역 같았다. 간절한 마음이면 꼭 신에 의존하지 않아도 이루고자 하는 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나, 모두가 인정하는 신을 내세운다면 자신의 믿음을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는 효과까지도 누리는 게 가능하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전쟁 당시 맹활약한 맥아더 장군을 신으로 영접했다는 인천 무당의 이야기는 살짝 어처구니없게 여겨졌다.

어느덧 마지막 장소에 도달했다. 계획을 곧이곧대로 이행했더라면 광흥창터까지 부지런히 걸어야 했으나 모두의 배꼽시계가 이미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살짝 오르막길을 따라 걸은 게 전부인데도 밤섬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오래 전 여의도에 홍수 예방 차원에서 뚝을 쌓으면서 폭파해 지금은 실체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더니, 너비가 7만 3천 평에 이르고 현재도 계속 면적이 늘고 있다 하였다. 인간의 출입이 통제된 곳답게 섬은 온통 푸르름으로 뒤덮였다. 이름 모를 철새들에게는 훌륭한 보금자리일 듯했다.

지금은 텅 비었으나 조선시대엔 누에를 치거나 선박을 수리하며 생계를 유지한 사람들을 이곳 밤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남북을 가로지른 수많은 다리를 이용하거나 유람선에 탑승해 한강을 건너는 일은 비교적 최근에야 가능해졌다. 조선시대에는 밤섬 또한 육지로 나오기 힘든 고립된 섬이었을 것이다. 섬 사람들 사이에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등 비윤리적인 행위가 만연했음을 담은 기록이 당대 사람들의 외로움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들을 향한 비난을 그들 역시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훗날 밤섬을 폭파하며 창전동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알게 모르게 팽배했던 무시하는 마음의 영향이 조금은 반영된 결과였지 싶다. 2001년부터는 1년에 한 차례씩 섬을 떠난 사람들의 섬 방문이 이루어지고 있다 들었다. 그들에게 1968년 2월은 어찌 기억되고 있을지. ‘그 땐 그랬지’ 라며 웃어넘기기엔 너무도 아찔했을 시간들이 내 것이 아니란 사실이 고마웠다.

부지런히 걸으며 들은 이야기로 머릿속 생각이 한 가득 들어찼다. 다들 광흥창역으로 이동하는데, 6호선이 다소 애매했던 나는 중간에 발견한 ‘따릉이’에 몸을 싣고 2호선 신촌역까지 달렸다.

중간에 구수동사거리를 지나쳤다. 시인 김수영을 언급할 때마다 등장하는 바로 그 구수동이었다. 시인이 오래도록 양계장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한 곳도, 버스에 치여 사망한 곳도 모두 구수동이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참여 시인으로 평가 받는 그의 흔적을 구수동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내가 거주하는 도봉구 쪽에 김수영 문학관이 2013년 11월 27일 문을 열었다.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개관일이 내 생일 바로 다음날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고 무덤 또한 도봉구에 있다. 김수영을 기리기에 도봉구가 아주 생뚱맞은 장소는 아닌 셈이다.

서울에는 문학관이 총 세 곳이 있다.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윤동주 문학관, 평창동에 위치한 영인 문학관 그리고 도봉구 방학동의 김수영 문학관이 전부다. 문학관의 존재 자체가 귀하니 도봉구에 김수영을 빼앗긴(?) 마포구로서는 한동안 머리를 쥐어뜯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페달을 밟다 보니 어느새 광흥창역 옆이다. 조선시대 관원에게 녹봉으로 지급할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이 일대에 있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염창동의 ‘창’과 마찬가지로 광흥창의 ‘창’도 창고를 뜻했다. 이제 쌀이 가득 들어찬 창고는 더 이상 없지만 창고 앞 동네 창전동이, 서대문구 안산에서 발원해 한강까지 흘러드는 창천이 창고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리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모든 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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