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0. 10. 24(토) 10:00~13:00
■ 장소 : 애오개역(5호선) 4번출구(아현공원)
■ 코스 : 한국정교회-경성감옥 터-신민당사 터- 옛마포아파트-토정동상-토정영모비-마포나루- 강변북로(올림픽대로)- 밤섬(이덕무) - 김수영 집터 – 광흥창터, 공민왕 사당
■ 주관 : 문화지평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서울의 종단별 첫 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을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종교‧근대건축물 답사] 2020년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의 ‘종단별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건축물 답사‧아카이빙’ 사업 6회차 답사가 지난 10월 24일 오전 10시 지하철 애오개역 4번 출구 아현공원에서 시작했다. 이번 답사는 우리에게 생소한 동방정교의 성니콜라스성당과 마포일대, 토정로, 마포나루, 밤섬공원 등을 둘러 봤다. 전상봉 해설사의 해설로 진행됐다.

답사팀이 모인 아현공원은 비극적 사건의 역사를 땅에 묻은 곳이다. 1994년 12월 7일 오후 2시 52분경 한국가스공사 아현밸브스테이션 지하실에서 누출된 가스가 환기통 주변 모닥불 불씨에 점화되면서 폭발을 일으켜 12명의 사망자와 부상 101명 등 인명피해와 건물 전파 75동, 부분파손 70동 등 물적 피해 등 큰 사고가 있었다. 전 해설사는 짧게 답사 일정을 설명하고 일행을 동방정교 성니콜라스대성당으로 이끌었다.

동방정교란?

▲ 한국 정교회 대교구 성니콜라스대성당의 임종훈 사제가 답사팀에게 동방정교의 역사와 성당 건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정확한 표현으로는 ‘동방 그리스도교’다. 정교회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영적 보화들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최초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워진 곳은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이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서쪽지역에서 발전되고 서방 중세로 이어진 서방 그리스도교 정신과 구별되는 것이 동방정교다. 서방 그리스도교가 고대 로마의 법과 도덕철학으로 유명한 땅에서 발전된 반면 동방정교는 셈족과 헬레네 문화로 유명한 땅에서 발전됐다.

서방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인간의 죄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면 동방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간의 신화(神話, 테오시스)를 강조했다. 서방이 종교 교리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면 동방은 신비적인 신학과 결부돼 있다는 것이 동방정교회 측의 설명이다.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 5대 교구로 운영됐다. 그러나 1054년 그리스도교의 분열이 일어나 동방정교는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4개 지역을 관할하게 됐고 로마는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졌다. 로마 카톨릭은 서방교회라고 불리었는데 동방교회는 이와 구분된 의미다.

사전 약속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지만 한국정교회 대교구 성니콜라스대성당 임종훈 사제가 답사팀을 환하게 반겨 맞았다. 임종훈 사제는 동방정교의 역사와 성당 건축과 내부 이콘(성화)와 이코노스타시스(성화벽)에 대해 최대한 이해가 쉽게 설명했다.

이콘은 동방 영성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에 대해 곽승용은 “‘쓰여 지고 말로 전해진 전승과 같이’ 이콘은 교회의 거룩한 전승을 드러내는 것 가운데 하나다. 성 바실에 따르면 제2차 니케아 세계 공의회(787)에서 이콘 그림을 믿음의 선포에 비유했다”고 했다.

동방정교회 측은 “성당 내부의 풍부한 색깔, 다양한 이콘들과 아름다움은 많은 가톨릭교회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에서 발견되는 단순성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룬다. 정교회 성당에 들어서면, 색깔과 빛으로 어우러진 완전한 신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성당의 예술과 디자인은 독특한 예배 분위기를 만들뿐만 아니라 정교 신앙의 근본적인 통찰들을 반영하고 구현한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세 번째 설명을 듣지만 여전히 동방정교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머릿속에 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신비롭고 새삼스럽다.

친근한 ‘대머리 교회’ 성니콜라스대성당

▲ 서울 마포경찰서 건너편 언덕에 위치한 동방정교회의 성니콜라스대성당. 동네 사람들은 ‘대머리 교회’라는 애칭을 붙여 친근감을 표시했다.

마포경찰서 건너편 언덕배기에는 둥근 지붕의 이색적인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지역민들에게 ‘대머리 교회’라는 별칭을 가진 동방정교회의 성니콜라스성당이다. 이는 한국에선 처음 세워진 비잔틴 양식 건축물이다.

정교회 교회들은 대부분 중앙의 둥근 돔을 통해 하늘의 빛을 수렴하는 비잔틴 양식을 쓴다. 성니콜라스대성당도 마찬가지다. 내부를 들어가도 천장의 거대한 돔이 인상적이다. 중앙 돔을 기준으로 신자석과 지성소가 나뉘고 양쪽으로 짧은 사각형 공간을 두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 형태를 띤다.

교회건축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 300년이 지난 후 부터라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300년 동안은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해 교회가 지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은 오로지 지하 무덤인 카타콤만 존재했다. 서기 313년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지하를 벗어나 지상에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됐다.

초기 교회 건축은 도심 중심부에 위치해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오갈 수 있었던 로마의 재판소인 바실리카의 형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이 평면형식은 그리스도교 이념에 의해 발전하다가 중세 고딕 건축양식을 형성하는 기초가 됐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구 성피에트로 대성당, 예루살렘 성묘성당, 세례당, 성콘스탄차 성당, 성스테파노 로톤도 등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환도하고 동로마 제국이 생기면서부터 비잔틴 건축양식이 탄생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터키인에게 점령될 때까지 동로마 여러 지방에 형성된 건축양식이다. 이 양식이 러시아까지 전파되어 그곳의 많은 교회건축물이 사라센양식의 교회건축으로 세워지게 됐고 그밖에도 세계 곳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비잔틴 양식은 창의 형태, 돔의 형태, 기둥의 모양, 외부세라믹의 모자이크 장식등이 그 특징인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돔 구조법의 발달이다. 로마시대에는 원형 평면 위에 돔이 축조됐으나 비잔틴의 돔은 4각형의 평면 위에 소위 펜덴티브를 사용해 그 상부에 돔을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우여곡절과 수난의 역사 한국 정교회

▲ 서울 마포경찰서 건너편 언덕에 위치한 동방정교회의 성니콜라스대성당. 동네 사람들은 ‘대머리 교회’라는 애칭을 붙여 친근감을 표시했다.

한국정교회 측은 정교회와 우리 민족과의 만남은 약 800년 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밝혔다. 이는 몽골군이 러시아를 지배하고 유럽을 유린하던 중세시대 몽골에 파견됐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근거한다. 몽골 왕실은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을 후히 대접했으며 그 때 고려 왕자들과도 접촉케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제한적인 화친이었다.

직접적인 관계는 러시아 정교회와는 260년 전 조선 영조 때 청나라 북경 사신 길에 올랐던 이윤신의 ‘문견사건’에 기록돼 있다. 그는 '큰 코 오랑캐'라는 의미의 대비달자(大鼻獺子)를 만났다고 했는데 이는 곧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였다.

19세기 말엽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치열하던 때 조선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군인들을 포함해 120여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30여명의 러시아 국적 소지 한국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예배과 제례 등 종교 활동을 집전하는 사제가 없었다.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불랴노프스키는 1897년 본국에 사제 파송을 요청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조선 선교사를 임명하고 성당에 안치할 물건들과 성사에 사용되는 성물을 확보한 후 1898년 초에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당시 조선은 친러파가 몰락했기 때문에 입국이 승인되지 않았다. 1899년이 돼서야 니콜라이 보제가 입국 허가를 받았고 1900년 1월초에 사제가 서울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러시아 공사가 자신의 관저 중에서 가장 큰 방 하나를 임시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인원이 늘면서 현재 경향신문 자리에 작은 성당을 지었다. 이 성니콜라스성당은 1967년 현재의 마포 아현동으로 성당을 이전하기까지 정교 활동의 중심이 됐다.

당시 성니콜라스성당은 고종 황제가 기증한 부지(현 정동 22번지) 위에 건립됐다. 모스크바에서 제작된 여섯 개의 크고 작은 종에서 울려 퍼지는 특이한 종소리로 이목을 끌었다. 소성당에 대성당을 지을 예정이었으나 1904년의 러·일전쟁과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따른 주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부에 대한 지원 약화로 좌절됐다.

▲ 성니콜라스대성당 앞에서 찍은 답사팀 단체사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선교된 한국 정교회는 처음에 1897년부터 1908년까지는 페테르부르그 대주교구에 속해 있다가 1908년부터 1923년까지는 블라디보스톡 대주교구에, 그리고 1923년이후 일본 대주교구에 소속된다. 한국 정교회는 러시아 내정 불안으로 인한 국내 미등기 재산권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1925년 교회 재산권을 당시 법인으로 인정받았던 ‘일본정교회 재산 협회’ 명의로 등기했다. 그러나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돼 국가로 귀속되는 불운을 맞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마지막 러시아 선교사가 떠나고 한국인 신부이자 당시 유일한 사제였던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 되는 등 당시 정교회는 소련 공산당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신도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한국정교회는 존폐기로를 맞는다.

때마침 그리스 종군 사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신부를 중심으로 재건에 힘써 전쟁 직후인 1953년 11월 29일 성당 복구 성수식을 거행했다. 이후 한국정교회는 국가로 귀속됐던 교회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회복하기 위해 소유권 확인 소송에 들어가 1965년 승로 판결을 받는다. 재판의 장기화로 감당할 수 없는 소송비용 때문에 정동 부지를 팔고 지금의 아현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관구 역시 러시아 정교회, 미국 대주교구, 뉴질랜드 대주교구를 거쳐 한국정교회 교구로 변화를 겪었다.

서부지법 자리는 경성형무소가 있던 터

▲ 옛 경성감옥과 경서중학교가 있던 터에 세워진 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전상봉 해설사(좌)와 경성감옥 수감자들이 노역한 연와공장 터에 지은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삼성마포아파트.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는 ‘독립운동유적지’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경성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을사늑약 전인 1908년에 서대문형무소 전신인 경성감옥이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졌다. 지금의 서대문형무소다. 경성감옥 수용 공간이 부족해지자 마포구 공덕동에 새 감옥이 만들어 경성감옥이라고 불렀다. 그때 서대문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46년에 마포의 경성감옥은 마포형무소로, 1961년에는 마포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3년 경기도 안양시에 안양교도소로 지어 이전하면서 이곳 수형시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마포교도소가 사라진 자리에는 경서중학교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서부지법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인근 삼성마포아파트 자리는 경성감옥에 수감 중이던 죄수들을 데려다 노역을 시킨 연와공장이 있던 터다. 삼성마포아파트는 국내 최초 단지형 아파트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서부지법에서 길 건너 보이는 SK허브그린 빌딩 자리는 신민당사가 있었다. 이 빌딩 앞 인도에는 신민당사 터 황동표지판이 박혀 있다. 삼각형 표지판에는 ‘1979. 8. 11 야당 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 진압과정에서 사망’이라고 적혀 있다. 삼각형 표지판은 국가폭력을 의미한다. 원형은 시민저항, 사각형은 제도 내 폭력이란 의미로 인권과 관련된 표지판이다.

토정 이지함의 흔적을 볼 수 있는 ‘토정로’

▲ 마포구 마포음식문화거리는 토정로에 있는데, 토정 이지함을 기려서 도로명으로 붙인 것이다. 이곳에는 그의 동상과 살던 집터가 가까이에 있다. 집터에는 그를 기리는 영모비가 있다.

답사팀은 토정로로 접어들었다. 토정로는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토정 이지함을 기린 도로명이다. 이지함은 1517년(인종 1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명현이었던 목은 이색의 7세손이다. 일찍이 용산 마포 강변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아래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를 짓고 살았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했다. 그는 키가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크고 체격이 다부졌다고 전해진다.

이지함은 빈부 격차를 줄이고 부의 재분배를 위해 양반의 상업 활동을 주장했다. 그는 도덕적인 양반이 상업활동을 해야만 이윤을 백성에게 골고루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방치되고 있는 나라 안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민생안정책을 주장하는 등 실학적인 면모를 가졌다.

학계에서는 이를 이지함의 ‘경세사상’이라고 표현하고 관련 연구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그가 살았던 마포나루는 쌀과 소금 등 조선팔도 물산이 유통되는 장소였다. 이는 그가 일찍부터 상업과 무역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그는 해상무역을 통한 국부 실현과 민생안정 계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지함은 또 당대에 뛰어난 풍수가, 예언가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명문 양반가 출신 정통 유학자의 남다른 관심 영역이라 믿음이 더했지 싶다. 그가 남겼다는 ‘토정비결’은 원작자 논란이 있지만 서민의 폭폭한 삶에 위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다했기에 누가 쓴 것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마포음식문화거리 중간쯤에는 토정의 동상이 서 있다. 근처에는 토정이 빈민들에게 구휼하는 동상도 있다. 가까운 곳에 토정이 살았던 집터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동상들이다. 동상이 서있는 사거리에서 한강방면으로 끝까지 걸으면 한강삼성아파트가 나온다. 토정이 살았던 집터로 특정되는 곳이다. 아파트 내부에는 ‘토정 이지함 선생 집터’라는 표지석과 함께 영모비 등이 있다. 아파트 경로당 이름도 토정경로당으로 지어 그를 기리고 있다.

삼개나루와 개발논리에 쫓겨난 밤섬 사람들

▲ 삼개나루를 나타내는 표지석과 밤섬공원에서 밤섬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토정 집터와 한강변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한강변에는 옛 삼개나루가 있던 터를 나타내는 표지석이 박혀있다. 삼개나루는 마포나루의 옛 이름이다. 마포 와우산, 노고산, 용산 서쪽 사면 구릉이 한강으로 뻗어 내린 곳에 세 곳의 포구가 있었다. 이를 용호, 마호, 서호로 불렀다. 이들을 함께 이르던 말이 삼개포구였다. 한자 표기를 하면서 석삼 대신 마 삼(麻)자로 쓰면서 마포로 부르게 된 것이다. 현 마포대교 북단 용강동 마포 유수지 부근이 마포나루였다.

마포나루터를 지나 답사팀은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밤섬공원에 다다랐다. 한강의 흔치 않은 섬 밤섬은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폭파장치에 연결된 단추를 누르자 이곳의 62가구 443명의 주민들은 기슭에 모두 나와 눈물을 흘렸다"(경향신문, 1968. 2. 12.)’

‘당시 서울시는 거주민에게 토지 보상비 836만원과 건물 보상비 720만원을 지급하고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 1000평에 연립식 주택을 지어 이주시킬 방침이라고 공약했으나(경향신문 1968. 2. 12.)’ 모두 거짓말이었다.

밤섬이란 이름은 마포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밤을 까놓은 것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졌다. 장마 때면 물이 불어 섬이 잠겼다 드러났다 해서 마포주민들은 이 섬을 거북섬이라고도 불렀다.

밤섬은 박정희 정권 시절 불도저식 개발로 유명한 김현옥 서울시장의 진두지휘로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여의도 개발에 필요한 흙과 돌이 필요했고 김 시장은 이를 밤섬을 폭파시켜 조달했다. 이를 위해 밤섬 주민을 강제이주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정권은 대부분이 문맹자였던 이들을 기망했다.

밤섬 주민들은 여의도 개발사업의 반사이익을 내심 기대했다. 대대로 수백 년간 배를 곯고 살았고 전기와 식수도 공급이 안됐던 이들에게 정권은 의식주를 완전히 보장하는 것처럼 제시했기 때문이다. 밤섬 주민들에게는 봉천동과 창전동 두 곳이 이주예정지로 제시됐고 이들은 밤섬이 바라보이는 창전동을 이주지로 결정했다. 그리고 가재도구를 챙겨 이주를 한 와우산 중턱 비탈진 언덕은 잡초만 무성한 빈 밭뿐이었다.

밤섬 면적은 24만㎡(7만3100평)으로 표고가 3.0~5.5m 평균표고 4m로 홍수 등으로 팔당댐 방류량이 초당 약 5000톤이 되고 한강인도교 수위가 4m 이상되면 대부분 범람한다. 퇴적물에 의해 밤섬의 면적은 매년 증가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천연기념물인 원앙 1종과 밤섬 번식조류인 흰뺨검둥오리, 개개비, 해오라기, 꼬마물떼새 등 조류 41종이 서식하고 철새 5000여 마리가 찾아오는 철새 도래지다. 식물은 버드나무, 갯버들, 용버들, 물억새 108종, 어류는 붕어, 잉어, 뱀장어, 누치, 쏘가리 등 28종이 주변에 서식한다.

밤섬 폭파 시 섬의 중심부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바람에 지금은 윗밤섬과 아랫밤섬으로 나눠져 있다. 윗밤섬의 만형태 호안은 밤섬 범람 시 수 많은 새들이 피할 수 있는 곳이다. 밤섬공원에는 조선 후기의 학자 박제가가가 밤섬의 풍경을 읊은 ‘율도’ 시비가 서 있다. 답사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예정했던 광흥창터와 공민왕 사당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참고문헌>
- 동방정교회 홈페이지
- 아름다움의 사랑, 도서출판 만남, 1997, 곽승용
- [종교건축 이야기]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서울신문,2007-05-30 23면
- 土亭 李之함의 經世思想 硏究’,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2003, 박상명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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