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마지막 휴가’(노거경 감독)는 평범한 소재와 캐릭터지만 그래서 더욱 친숙한 우리 이웃, 더 나아가 우리의 얘기이기에 폐부 깊숙이 찌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게 만든다. 하나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보낸 기러기 아빠 5년 차의 오 부장은 소화불량으로 병원을 찾는다.

의사는 3개월 시한부의 위암 말기 판정을 내린다. 평소 회사를 위해 성실하게 일했고, 부원들을 알뜰하게 챙겨줬으며, 한눈팔지 않고 오직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모든 의지를 잃고 사직서를 던진 뒤 변두리 셋방에서 지내며 동네 슈퍼와 식당과 실내포차를 전전하며 고통과 힘겨운 싸움을 한다.

순미는 어릴 때 만난 창현과의 불장난으로 첫딸을 임신한 뒤 결혼해 현재 여고생인 둘째 딸까지 낳았지만 8년 전 이혼한 뒤 슈퍼를 운영하며 악착같이 두 딸을 성장시켰다. 하지만 철없는 창현은 틈만 나면 찾아와 푼돈을 뜯어 가는가 하면 딸들을 위해 사업을 하겠다며 자주 돈을 빌려달라고 성화다.

맏딸은 직장에 다니지만 쥐꼬리만 한 급여가 불만인 데다 매달 카드 값 돌려 막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둘째는 21살 된 ‘오빠’에게 애걸복걸 매달리지만 오빠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고 오직 돈에만 관심이 있다. 그녀는 오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조교제로 번 돈을 바치지만 그는 돈만 챙겨 사라진다.

순미는 전과 달리 한낮에 동네에서 어슬렁거리는 오 부장에게 관심을 보인다. 오 부장은 회사를 그만뒀다며 라면을 잔뜩 산다. 순미는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려 하냐고 묻고 오 부장은 직접 미국에 가려 한다고 답한다. 오 부장을 가장 따랐던 직계 후배인 미혼의 조 과장이 직접 실내포차로 온다.

그는 조심스럽게 새로 생긴 애인도 불렀다고 양해를 구하고 곧 ‘그녀’가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등장한다. 그녀가 오 부장이 권하는 술을 거부하자 조 과장은 버릇없다며 따진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옆자리의 거나하게 취한 젊은 노동자들이 시비를 걸어 싸움이 나 술집은 아수라장이 되는데.

모든 시퀀스가 시나리오까지 쓴 감독의 경험으로 인식될 만큼 현사실적이다. 소름 끼칠 정도로. 오 부장은 조 과장에게 왜 아직 결혼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조 과장은 “차장 진급하면 하려고요”라고 말하면서도 “앞이 안 보이네요”라고 매우 부정적인 속내를 털어놓고 “부장님 대단하셔”라고 말한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 아이를 유학 보내는 게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는 사회.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이 극에 달했다는 얘기다. 오 부장은 “그냥 살아가는 거지”라고 답한다. 이 시대의 가장은 위대해서 이 험난한 세파를 이겨내고 가정을 이룩해서 가족을 잘 지키는 게 아니라 관성적이라는.

그 타성은 오 부장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시니컬하고 상투적인 말투로 곧 죽을 목숨이라고 통보한 뒤 통곡하는 그를 뒤로하고 다른 업무를 보러 나가는 의사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나만 심각할 뿐 세상은 나의 고통과 불행에 무관심하다. 감독의 메시지는 여기서 확연해진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

그의 ‘권력에의 의지’나 ‘위버멘시’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자기애다. 그래서 퓌론에서 시작된 회의주의도 강하게 느껴진다. 니힐리즘의 일종으로서의 회의주의가 아니라 상대주의적인 측면에서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자 카르네아데스의 이기주의다.

오 부장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죽을병에 걸렸을까?). 하느님이 실수한 걸 거야”라고 뇌까린다. 이 의심과 숙명론적 자세와의 공존은 정말 회의적이다. “왜 돈 안 보내? 왜 이번엔 적지? 설마 나더러 돈 벌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당신 아빠 맞아?”라는 아내를 보면 그럴 만도.

찰스 테일러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서 마지막 상상으로 민주적 자기 지배 즉 인민주권을 든다. 오 부장, 조 과장, 취객은 인민주권이 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 산 것이다. 실내포차에서 취객이 조 과장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는 조 과장이 자기들 일자리를 빼앗는 스리랑카 노동자를 닮았다는 것이다,

취객은 화이트 컬러인 조 과장으로부터 자격지심을 느꼈다. 순미는 “애들 키우기 위해 돈 버느라 동네 밖 구경도 못 하고 나이만 먹었다”라고 푸념한다. 세계와 부자는 세월처럼 빈자에게 불친절하거나 무심하다. 끝 무렵 두 명의 ‘기생충’은 마지막 휴가를 계획한다. 무참하거나 혹은 희망적이거나.

순미가 라면 두 박스와 두루마리 휴지 한 박스를 들고 높디높은 계단을 오르는 시퀀스는 다분히 ‘기생충’이 연상된다. 순미가 첫걸음을 내디딘 계단 쪽은 빈민촌이고, 그녀가 배달할 목적지인 계단 끝엔 번듯한 아파트가 보인다. 힘들게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그만 손에서 라면 박스를 놓치고 만다.

그러자 휴지 박스를 내던진 뒤 망연자실, 그대로 앉아 엉엉 운다. 그렇다. 양사언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는 틀렸다. 서민이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부의 자리는 요원하다. 로또 1등 당첨자가 부자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부자로 안 살아봐서 부자로 사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지 낭비벽 때문이 아니다.

순미는 “자식 뼈 빠지게 키워봤자 제가 혼자 큰 줄 안다”라고 회한 담긴 말을 쏟아낸다. 독립영화의 미덕은 산만한 시퀀스가 뒤에 가면 한자리에 모인다는 통일성에 있다. 이 작품도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가 아닌 “그래도 삶은 살아진다”라는 결론으로 슬프면서도 따뜻하게 매조진다. 10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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