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사라센은 역사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아라비아 북부인들을, 종교적으로는 십자군 시대에 유럽이 이슬람교도를 칭하던 말이다. 현역 경찰 임재영 감독이 연출한 첫 장편 영화 ‘사라센의 칼’은 그런 역사, 종교적인 내용과는 다른 이주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의 인권과 노스탤지어를 그린다.

윤아(신지수)는 미군부대 근처에서 주점을 하는 ‘양공주’ 엄마와 단둘이 산다. 어느 날 흑인 병사 한 명이 엄마에게 제대로 돈을 지불하지 않은 걸 본 윤아는 저도 모르게 병사에게 칼을 휘두른다. 엄마는 그 죄를 자신이 뒤집어쓴 뒤 윤아를 피신시킨다. 윤아는 유리공장에 취업해 가건물에서 산다.

사장과 그의 충복 김 반장이 통솔하는 공장은 사뭇 전제주의 나라를 연상케 한다. 윤아는 이주 노동자 알란(검비르)과 여상 3학년 신입 경리 은지와 동병상련으로 친하게 지낸다. 그녀의 생일에 알란은 케이크, 요리, 고국의 전통 칼을 선물로 준다. 윤아는 재채기를 달고 사는 그에게 약을 사준다.

사장은 툭하면 세 명의 월급을 연체하고 심지어 사장과 김 반장은 윤아와 은지에게 성추행을 가한다. 김 반장은 알란에게 수시로 폭력을 휘두른다. 사장이 은지를 강간하려 하자 윤아가 이를 말리다 사라센의 칼을 휘두른다. 사장이 분기탱천해 살의를 품자 알란이 나서 그녀들을 돕다가 칼에 맞는데.

윤아는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 집도 뒤로 한 채 타지에서 부유하는 낙오자에 다름 아니다. 항상 엄마와 집을 그리워하지만 돌아간들 뾰족한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당장 아쉬운 대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공장과 몸을 누일 수 있는 가건물 트레일러가 있는 이곳에서 잔류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

엄마는 그야말로 돈에 ‘환장’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윤아는 고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서 중퇴해 생계 일선에 뛰어들고자 했지만 엄마의 ‘고교 졸업장도 없이 뭘 하냐’는 고집 하나만큼은 거역할 수 없었다. 엄마가 돈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는 하나뿐인 딸만큼은 가난의 설움을 겪지 않게 하려던 것.

알란은 불법 체류자다. 불량배 2명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만큼 힘과 무술 실력을 갖췄음에도 김 반장의 무차별 폭력에 저항할 수 없는 이유는 서열이 낮기도 하지만 공장이 불법 체류자임을 눈감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리 실력이 남다른 그의 꿈은 돈을 모아 고향에 돌아가 식당을 차리는 것.

어쩌면 공장에서 제일 지위가 낮은 알란보다 윤아가 더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은지는 제2의 윤아다. 여상 졸업을 앞두고 공장에 취입한 게 꼭 윤아의 전철을 밟는 것 같다. 사장은 그의 서툰 업무 능력을 빌미로 공장의 육체노동을 강요하고, 퇴사하겠다니 그동안 먹은 밥값을 내라고 협박한다.

경찰로서 현장에서 겪은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하고자 하는 임 감독의 의도는 많은 독립영화 관계자들에게 거울이 될 법하다. 사장과 김 반장의 악행이 다소 과장되게 묘사되고, 그에 대한 세 주인공의 대응이 지나치게 무기력한 점 등의 거친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갖는 존재의 무게다.

시건장치마저 허술해 김 반장이 무시로 들락거릴 정도로 열악한 숙소에서 기거하는 윤아의 유일한 휴식처는 동네 벌판에 방치된 한 SUV 폐차. 그 안에 앉은 윤아와 은지가 촛불 하나의 온기에 포근함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는 시퀀스는 이 작품 중의 가장 서럽고도 제일 아름다운 장면이다.

윤아와 알란이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매개는 ‘클레멘타인’이다. 1849년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부 캘리포니아의 금광으로 몰려왔던 포티나이너들은 가혹한 노동과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본가들의 배만 불려 줬다는 자조감에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 곡을 만들었다.

사장은 지구대의 중견 형사에게 돈 봉투를 건네며 지구대장과 필드에 한 번 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공권력의 눈을 가려 불법 체류 노동자를 헐값에 고용하는가 하면 인부들의 급여를 미루거나 각종 핑계로 깎으면서 축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윤아, 은지, 알란은 포티나이너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제 18살의 은지는 생애 처음으로 공장에서 육체노동을 경험한 후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며 윤아를 위로한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윤아는 시골집에서 베틀을 짜는 엄마를 그린다. 하지만 마지막 시퀀스에서 윤아가 빨랫줄에 걸린 면포들을 배경으로 검무를 추는 장면은 다소 뜬금없어 생뚱맞다.

제목이 ‘사라센의 칼’인 건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감독의 메시지와 거리가 좀 있어 아쉽다. 알란은 제 딸이 쿠마리라고 말한다. 쿠마리는 네팔인들이 모시는 처녀 신이다. 궁중 쿠마리와 지역 쿠마리가 있으니 그녀는 지역 쿠마리다. 그런데 알란은 87%의 힌두교도가 아니라 4%의 이슬람교도!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중동의) 유목민은 먼길을 떠나기 전에 돌아올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미 낙타가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새끼 낙타를 살육한다. 어미 낙타는 새끼 낙타의 무덤을 반드시 찾아내므로’라는 자막이 깔리지만 영화가 웅변하려는 메시지와 그리 부합돼 보이진 않는다. 1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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