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개 같은 내 인생’(1985)처럼 성장과 아름다운 이별이 있듯 ‘길버트 그레이프’(1993) 역시 마찬가지다. 캠핑카들은 성지처럼 찾아오지만 정작 마을 사람들은 떠나고 싶은 시골 엔도라. 길버트(조니 뎁)는 읍내 작은 마켓에서 일하는 아주 평범하고 착한 청년이다.

7년 전 아버지는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 그 후 엄마는 외출을 끊고 소파에 앉아서만 살아 200kg의 거구가 됐다. 형은 가출했고, 누나 에이미는 실직했다. 곧 18살이 되는 어니(리어너도 디캐프리오)는 지체장애로 아직 아이 같고 15살 엘렌은 사춘기라 길버트와 사사건건 부딪치며 다툰다.

집은 생전에 아버지가 지었지만 지속적인 수리는 길버트 몫이다. 아니 식사 준비와 빨래 등 사소한 가사를 제외하곤 가족사의 모든 건 길버트가 해낸다. 그의 유일한 휴식은 수리공 터커, 장의사 바비와 함께 패스트푸드 식당에 앉아 수다 떠는 것. 터커는 곧 입점할 햄버거 체인에 취직하는 게 꿈.

바비는 사람이 많이 죽어 사업이 확장되는 게 희망사항. 그러나 길버트에게는 다른 것 없이 그저 가족이 평안하고, 특히 엄마의 소원대로 어니가 18살 생일을 맞고, 28살 생일도 맞는 것이다. 예전에 의사는 어니가 10살을 못 넘긴다고 했기 때문. 길버트는 유부녀 베티와의 불륜으로 일탈을 즐긴다.

야영지에서 할머니와 함께 묵는 베키(줄리엣 루이스)가 길버트의 마트에 식료품을 사러 온 것을 계기로 둘은 친해진다. 엔진 부품의 결함으로 베키의 야영은 길어지고, 어느덧 둘은 연인으로 발전한다. 길버트와 달리 베키는 전국 방방곡곡을 떠돈 풍부한 경험의 소유자로 부품만 오면 떠날 터인데.

길버트는 여자들로 인해 성장한다. 가장이라는 무게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아버지와 그가 남긴 책임감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형을 대신해 가장이란 굴레를 썼고, 그게 지극히 당연한 듯 일상을 살아간다. 어니는 수시로 높은 구조물에 올라 보안관의 출동을 야기하지만 길버트는 매번 묵묵히 감내한다.

동네 아이들은 창밖에서 고래 같은 엄마를 ‘관람’하고 누이들은 그걸 질색하지만 길버트는 무관심할 뿐. 에이미는 하는 게 뭐 있냐며 푸념하고, 엘렌은 무시한다. 엄마는 어니에게 조금 더 잘하라고 다그친다. 그래도 길버트는 아버지가 죽기 전 엄마는 미인이었다며 묵묵히 어니의 목욕을 시켜 준다.

집안의 여자들에게서 인내와 책임감을 배운다면 베티로부터 성에 눈을 떴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임엔 틀림없다. 그리고 방점은 베키가 찍어 준다. 길버트는 캠핑카를 보며 항상 떠날 수 있는 그들을 부러워하지만 자신은 떠날 엄두를 못 낸다. 가족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기 때문.

베키의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엄마가 에어로빅을 하고, 엘런은 빨리 컸으면 좋겠다. 어니의 뇌는 새것으로 바꿔 주고 싶고 새 집도 필요해”라고 답한다”. “가족들 말고 너만을 위한 것 말이야"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그 안에는 오직 가족밖에 없지만 가족 안에 그는 없다.

베키는 길버트의 집과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요청한다. 처음엔 만나기 싫다던 엄마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녀에게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며 자신의 몸을 변호한다. 베키는 “저도요”라고 그녀를 응원한다. 길버트와 가족은 변함없는 마을처럼 한 곳에 고여 있었지만 베키가 길버트를 해방시킨다.

길버트의 미모 칭찬에 베키는 “난 외적인 미모엔 관심 없어. 오래가지 못하니까. 중요한 건 무슨 일을 하느냐지”라고 한 수 가르친다. 자꾸 엄발나는 어니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른 길버트는 이내 자책하며 어니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베키의 부드러운 권유로 어니가 강에 몸을 담근다.

그는 물에 트라우마가 있는데. 길버트는 깨닫는다. 변화와 진화를. “아버지는 감정 없이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었어”라고 원망하자 베키는 “내가 알던 남자도”라고 길버트를 훈계한다. 그토록 기다리던 어니의 생일 파티를 치른 뒤 엄마가 7년 만에 2층 계단을 오르더니 침대에 누워 편하게 떠난다.

가족은 장례식보다 엄마의 시신을 옮기는 게 구경거리가 될 것을 걱정한다. 길버트는 모든 가재도구를 밖으로 옮긴 뒤 집에 불을 지름으로써 숙제들을 해결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을 연상케 하는 이 시퀀스는 신만 제거한 희생과 구원이라는 그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길을 간다.

가족만 생각하고 사랑할 줄 알았지만 본능인 성욕 해소 외에는 자신을 돌볼 줄 몰랐던 데카르트의 주관적 관념론에 빠져있던 길버트는 베키로 인해 비로소 베이컨의 객관적 실재론으로 옮겨가고, 스피노자의 자유론을 배운다. 가볍게 생각하는 경신과 내용 없이 겉치레만 하던 분식에서 벗어난다.

의례적이던 태도에서 직각적으로 변모한다. 스피노자의 존재론 체계는 실체(본래적 존재), 속성(본능), 양태(현존재)로 구성된다. 길버트의 실체는 소산적 자연(자연의 재료와 내용)에 머물렀을 뿐이고, 베티에 의해 속성에 이르긴 했지만 정체돼 있다 베키를 만나 능산적 자연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건 베르그송의 생의 비약, 다윈의 창조적 진화, 서른 살에 집을 떠나 방방곡곡을 떠돌며 위버멘시가 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다. 베키는 마치 “의지가 주인이고 지성은 안내인일 뿐”이라던 쇼펜하우어를 길버트에게 가르치는 듯하다. 이런 걸작을 만든 할스트롬이 있다는 건 가족에 대한 희망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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