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창진의 포토에세이] 미국의 국회의사당. 워싱턴 D.C.의 중심부 캐피톨 힐(Capitol Hill)에 위치해 있으며, 보통은 국회의사당을 캐피톨(Capitol)이라고만 부른다. 캐피톨이라는 이름은 로마 시내의 일곱 언덕 중 가장 신성하게 여겨졌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유래했다. 국회의사당의 건물 내 서쪽과 동쪽은 각각 상원과 하원 의사당으로 쓰고 있다. 영국 국회의사당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국회의사당이기도 하다.

상당히 거대한 규모지만, 처음부터 이런 규모로 지어졌던 것은 아니고 오랜 시간동안 수차례의 증축을 거듭한 끝에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의 상징이라고 착각하는 그 크고 아름다운 돔도 처음에는 없었고 몇 번의 증축을 거듭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돔 꼭대기에는 6m 높이의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데, 이 조각상을 설치한 인부들은 모두 노예였다.

세계 정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곳답게 경비가 삼엄하다. 평소에는 가이드 투어도 운영하고 있으나 비행기 출국장에 진입하는 수준의 검색을 받아야 하며 의사당 내부의 촬영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또한 많은 것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 것. 가이드가 끝나고 지하 터널을 통해 국회의사당 앞의 국회도서관으로 갈 수 있다.

국가의 대표기관으로서 국회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하나로 워싱턴 DC의 행정구역 내에서는 워싱턴 기념탑보다 높은 건물은 지을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되고 있다. 그래서 워싱턴 DC의 행정구역은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고층 건물을 찾아볼 수 없다.

뒷편으로는 거대한 공원과 내셔널 몰이라는 박물관들이 있으며, 워싱턴 기념탑과 링컨 기념관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때문에 링컨 기념관 앞이나 국회의사당 뒤편에 서 있으면 이 모든 게 다 보여 꽤나 웅장하게 느껴진다. 다만 거리가 좀 멀어서 걸어가기에는 힘들다. 내셔널 몰에 있는 박물들은 주로 스미소니언 재단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으로, 박물관이 살아있다 2편의 주 무대인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은 그 중 하나다.

육체적 폭력은 덜하고, 말싸움도 그렇게 격렬하지 않은 편. 법적으로는 특정 조건 충족시 입법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라는 방해 공작을 펼칠 수 있다. 근데 그 이전에 애초에 이 동네는 로비가 완전히 합법이기 때문에, 대체로 돈으로 방해 공작을 펼친다. 가히 돈지랄 정치의 정점을 볼 수 있는 동네.

워싱턴 메트로에 캐피톨 사우스 역이 있긴 한데, 그냥 DC 서큘레이터 DC Circulator를 타자. 역이 좀 외진 곳에 있다.

관광은 예약을 하지 않아도 무료로 가이드와 함께 가능하다. 구 법정, 로툰다를 포함한 내부를 볼 수 있지만 의사당은 불가능하다. 지하 터널로 국회 도서관과 연결되어 있어 함께 관광하면 일석이조.

2014년 현재 돔에 300개가 넘는 균열이 발견되어 보수 공사 중이다. 3년 이내로 완료할 예정. 그래서 비계가 외부에 설치되어있고 내부에도 커튼 같은 막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천장에 있는 벽화 '워싱턴의 신격화(The Apotheosis of Washington)'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조지 워싱턴이 처녀 13명에게 둘러싸여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 폭정과 압제로부터 자유를 수호하는 컬럼비아, 발전기와 배터리 및 인쇄기를 벤자민 프랭클린, 새뮤얼 모스, 로버트 풀턴에게 보여주는 미네르바, 대서양 횡단 전신 케이블을 설치하는 걸 보여주는 넵투누스와 베누스, 로버트 모리스에게 돈가방을 건네주는 메르쿠리우스, 찰스 토마스에게 대포와 대포알을 보여주는 불카누스, 맥코믹 수확기 작동법을 보여주는 케레스 등 로마 신화의 여러 신들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새로운 기계와 기술적인 영감을 선보이며 미국의 번영을 약속하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역사

1793년 9월 18일 11시 15분에서 12시 30분 사이에 프리메이슨의 복장을 갖춘 조지 워싱턴이 삼각대와 도르래를 사용해 국회의사당의 주춧돌을 내렸다. 참고로 200년 후인 1993년 9월 18일, 국회의사당 건설 200주년을 기념해 이 정초식이 재현되기도 했다. 설계는 의사 겸 아마추어 건축가 윌리엄 손튼이 맡았는데, 루브르 궁전에 있는 페로의 열주랑과 팡테옹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도를 작성했다. 북쪽 날개에 들어갈 상원 건물이 공사중인 상태인 1800년 11월 17일에 필라델피아에 있던 국회가 이곳으로 옮겨와 정기회를 열었다.

파괴와 재건, 확장

비록 국회가 열리기는 했어도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가운데 미영전쟁이 발발해 1814년 8월 24일 의사당 건물 일부가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조지 뱀포드와 조셉 가드너 스위프트가 복구를 맡아 1815년부터 재건에 착수해 1819년에 끝났다. 이 과정에서 청동을 입힌 목조 돔이 1826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돔은 판테온을 닮은 외관을 취하고 있었다.

이후 연방에 귀속된 주가 늘어남에 따라 1850년에 의사당을 대폭 확장했다. 건물이 커지면서 기존의 돔이 너무 낮고 왜소해 보이자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은 건축가 토머스 발터에게 새로운 돔을 의뢰했고 발터는 유럽 여행 때 자신이 봤던 앵발리드, 세인트 폴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과 도면으로만 접한 성 이사악 대성당의 돔을 참고해 직경 29m짜리 돔을 설계했다. 네 곳의 돔 모두 모두 전통적인 양식에 따라 기부와 두 개의 드럼, 둥근 지붕, 채광 정탑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성 이사악 대성당의 돔은 주철로 건설되었다. 발터는 국회의사당의 돔을 지을 재료로 주철을 선택해 돌과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도 내연성이 강하고 더 경제적인 재료를 골랐다.

발터의 돔은 외부의 주철 돔과 내부의 석조 돔으로 된 이중 구조이며, 돔 천장에 뚫린 채광 구멍을 통해 콘스탄티노 브루미디의 프레스코화 '워싱턴의 신격화'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돔은 1855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국회의사당은 연방의 영속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판단에 따라 돔 공사를 재개한다는 결정이 1862년에 내려졌다. 1863년 12월 2일 자유의 여신상이 돔 꼭대기의 채광 정탑에 올려졌고, 1866년에 돔이 완공되었다. 공사에는 4천여 톤의 주철이 사용되었으며, 외벽은 흰색으로 칠해 석재 돔과 같은 질감을 나타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해 유해가 의사당 돔 지붕 아래 로툰다 홀에 안치됐을 때도 콘스탄티노 브루미디는 자신의 대작 '워싱턴의 신격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공된 새 돔이 기존의 의사당 열주랑을 압도했고(…), 이에 따라 1884년부터 1891년까지 대리석 테라스가, 1958년에는 동쪽 정면의 열주랑이 추가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로툰다에는 허레이쇼 그리노프(Horatio Greenough)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을 본떠 조각한 조지 워싱턴의 좌상이 1843년에 설치되었으나 '벌거벗은 워싱턴이 옷을 찾기 위해 손을 하늘로 뻗었다'는 등의 조소를 듣는 등 설치 당시부터 많은 비판을 받은 끝에 1908년 스미소니언 협회로 옮겨졌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