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인턴’(낸시 마이어스 감독, 2015)은 노인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노인들의 경제활동 단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매우 교훈적인 시사가 큰 영화다. 한때 전화번호부 제작 회사에서 부사장까지 역임했지만 이제 퇴직하고 아내와 사별한 70살 벤(로버트 드 니로)의 일상은 나름대로 풍요롭다.

매일 정시에 일어나 단골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공원에서 동호인들과 태극권을 연마한다. 게다가 그동안 쌓은 마일리지로 심심찮게 세계 여행도 다닌다. 당당하게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옷차림에도 신경을 쓰니 동네 할머니들로부터 심심찮게 추파도 받지만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느 날 우연히 OTF라는 인터넷 의류 판매 회사에서 지역사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실버 인턴사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서를 제출해 덜컥 합격한다. 이 회사는 30살 주부인 줄스(앤 해서웨이)가 설립해 18개월 만에 직원 220명의 큰 규모로 성장시킨 촉망받는 중소기업이다.

벤은 특별한 보직 없이 줄스 담당으로 배정된다. 회사는 날로 성장하는데 줄스에겐 경영의 경험과 전문성이 부족해 투자자들이 전문 CEO를 영입하라고 압박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후보자들을 면담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남편 매트는 줄스를 위해 전업주부가 돼 유치원생 딸 페이지의 육아까지 맡고 있다.

처음엔 벤이 탐탁지 않았던 줄스는 풍부한 경험과 타고난 인격으로 사소한 일부터 자신의 인생의 위기까지 잘 관리해 주는 데 호감을 느끼고 때론 감동까지 하며 점점 더 신뢰를 쌓아간다. 벤은 회사 일은 물론 줄스의 가정사까지 챙겨주게 되는데 매트가 페이지 친구 엄마와 불륜 관계인 것을 목도한다.

줄스는 투자자들이 가장 믿는 CEO 후보를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가는 길에 매트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하지만 페이지의 스케줄 상 불가능하자 벤에게 대신 부탁한다. 샌프란시스코 호텔에 여장을 푼 줄스는 조심스레 남편의 불륜을 알고 있다며 새 CEO를 고용하고 가정에 충실함으로써 가정을 지키고 싶다고 고백하는데.

드 니로라고 하면 팬들은 ‘대부’ 등의 누아르나 거울 앞에서 권총을 쏘는 시늉을 전 세계에 유행시킨 연기의 교과서인 ‘택시 드라이버’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해서웨이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인터스텔라’ 등이 인상 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둘은 기존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국내 개봉 당시 361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유는 그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더불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시나리오에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나이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다. 이미 없어진 ‘계급’인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노인에게 아무 거부감 없이 사용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

그런 만큼 사회적으로 나이 제한의 역차별도 만만치 않다. 신입사원의 나이 제한부터 냉정한 정년퇴직까지. 물론 회사가 어려울 때 정리해고의 기준에서 고령이 앞줄에 놓이기 다반사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일방통행은 시대의 변화에 좀 맞지 않는 경향이 다분하다. 지금 대도시에서 환갑잔치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OTF의 임직원 중 정장을 입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정장을 고수하는 벤에게 그들은 “계속 그렇게 입을 거냐”고 물을 정도. 근무 환경에도 임원과 직원, 그리고 줄스까지 차별이 없다. 넓디넓은 한 층에서 모두 동등한 책상에서 근무한다. 인터넷을 플랫폼으로 하는 만큼 모두 얼리 어댑터다.

벤은 줄스의 도움으로 SNS를 시작한다. 이처럼 벤은 IT나 유행에서 뒤져있지만 절대 보수적이진 않다. 다만 원칙과 경험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 작품이 가진 미덕이다. 나이와 경험이 많다고 결코 그걸 자랑삼거나 전가의 보도처럼 젊은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사원들의 사적인 고민을 듣고 솔루션을 주거나 사무실의 사소한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데 앞장선다.

아주 대놓고 영국의 경험론을 쉽게 풀어 한 편의 멋진 인생 드라마를 썼다. 줄스의 비서 베키는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해도 업무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다. 벤에게 업무를 나눠 주라는 줄스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베키는 상실감, 자격지심, 서운함 등에 눈물을 터뜨린다.

그러자 벤은 자신의 공로를 자연스럽게 베키에게 돌리며 줄스가 그녀를 배려하게끔 유도한다. 업무도 꼬이는데 줄스는 실수로 엄마를 비난하는 이메일을 직원에게 보낸다는 게 엄마에게 보낸다. 직원들에게 해킹을 지시하지만 불가능하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벤이 아주 단순한 해결 방법을 내놓는다.

칸트의 업적 중 가장 돋보이는 건 근대 철학의 양대 라이벌인 합리론과 경험론의 화해였다. 합리론은 고정된 개념과 선험적 준거틀에 의해 형성된 보편의 진리를, 경험론은 후천적으로 쌓은 감각적 경험에 의한 결론을 각각 인식론의 최전방에 내세운다. 모두 옳은 면도, 그른 면도 공존한다.

칸트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다’며 간단히 둘을 악수하게 만들었다. 줄스는 자신이 세우고 일군 회사니만큼 자신의 위에 CEO를 세우는 게 싫지만 가정을 위해 마지못해 옹립하려 한다. 벤은 그게 옳지 않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지만 섣불리 충고하지 않는다.

회사의 성장과 안정을 위해선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다는 게 합리주의라면 OTF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는 이는 줄스라는 게 경험주의다. 항상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 데 대해 젊은 직원이 그게 왜 필요하냐고 묻자 벤은 “우는 여자에게 빌려 주기 위해”라고 답한다. 줄스는 매트에게 “당신이 손수건을 갖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페미니즘의 일부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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