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내일의 안녕’(훌리오 메뎀 감독, 2015)은 신파조로 나가지 않아 매우 감동적인, 삶의 의미와 방향을 묻는 영화다. 교사 마그다(페넬로페 크루즈)는 3달 전 실직했고, 동시에 철학과 교수인 남편 라울이 여제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다. 프로 축구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인 외아들 다니와 함께 살고 있다.

오른쪽 가슴에 멍울이 잡혀 부인과를 찾았더니 주치의 훌리오는 유방암 진단을 내린다. 다니의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중 레알 마드리드 청소년팀 스카우터 아르투로를 알게 돼 대화를 나누던 중 전화를 받은 아르투로가 쓰러진다. 교통사고로 아내는 혼수상태고 딸은 사망한 것. 둘은 그렇게 친해진다.

오른쪽 가슴 제거 수술 후 완치 판정을 받은 마그다에게 아르투로는 선물로 다니와 동반한 바닷가 휴가를 마련해 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해 다니까지 함께 아르투로의 집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제2의 인생을 찾은 마그다는 어느 날 훌리오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다.

왼쪽 가슴의 암세포가 폐까지 전이돼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의외로 그녀는 침착하게 오히려 아르투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기적처럼 임신을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눈을 감을 시한부의 운명. 기쁨과 절망이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마그나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할 의지를 불태우는데.

원제는 ‘Mama’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시 같은 따뜻하고 감동적이며 슬픔의 눈물이 아닌, 인생의 희망을 찬양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인트로에서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을 걷는 5살 고아 소녀 나타샤가 등장한다. 훌리오의 책상 위에는 나타샤의 사진이 놓여있다.

마그다는 그녀의 존재를 묻고 훌리오는 입양하고자 하는 소녀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훌리오 부부는 지난한 입양 수속에 지쳐 끝내 입양을 포기한 데다 부부 사이가 벌어져 별거 중이다. 심지어 아르투로는 전처를 떠나보낸 지 1년도 안 돼 새 아내의 장례식을 치를 처지다. 누구나 삶의 고통은 있다는.

아르투로는 독실한 신자이지만 마그나는 무신론자다. 막달레나란 본명을 지녔음에도. 대신 그녀는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은 믿는다. 아니, 믿는다기보다는 그렇다고 주장함으로써 위안을 찾고 용기를 얻으며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태아에게 나타샤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피타고라스의 윤회론.

다니가 불룩 솟은 배에 뭐가 들었냐고 묻자 그녀는 한 엄마가 4000km 떨어진 시베리아에 갔고, 거기서 나타샤를 만났더니 그렇게 됐다고 설명한다. 또 나타샤는 자신이 아르투로와 다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마그다의 주관적 관념론은 CG로 그린 심장을 인서트로 삽입해 수시로 표현된다.

그녀는 한쪽 가슴을 도려냈지만 심장은 여전히 활발하게 뛰고 있다. TV에선 청년 실업률이 제일 높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녀도 실업자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척박해져도 어머니의 모성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심장은 맹렬하게 약동한다. 또 비록 심장이 멈추더라도 엄마의 영혼은 사랑하는 자식 곁에 머문다.

마그다가 믿는 인생은 용기와 운명론이 지배한다. 수술 때 그녀는 “일부러 혼자 왔다. 강해지려고”라고 훌리오에게 말한다. 거울을 보며 “기운 내자”라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운다. 훌리오로부터 시한부를 통보받자 그녀는 가발을 케이스에 넣고 짧은 머리에 불룩한 배로 당당하게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나온다.

훌리오가 “항암치료로 삶의 질은 나아질 수 있다”고 약물의 힘을 빌려 조금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자고 하지만 구토하고 어지럽게 사는 걸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살아서 아기 얼굴을 보고 싶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세상과 작별할 것”이라며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세 식구는 화단에 씨를 뿌리고 식물을 심는다. 마그다는 나타샤에게 영상 편지를 남긴다. “뒷걸음질하거나 돌아갈 수 없다. 둘이서 전진하는 거야. 너는 너의 시작을, 나는 나의 마지막을 둘이 함께 하는 거야”라고. 식사 중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혀 세상을 거꾸로 보는 시퀀스는 그런 죽음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죽음은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게 아니라 언젠가는 맞아야 할 운명이라는 것. 쇼펜하우어는 “살고자 하는 욕구는 고통과 죽음으로 이끌 뿐”이라고 말했다. 생철학은 기존의 철학의 주류 기조였던 이성주의의 반대편에 서서 본능적인 감정, 욕구, 충동 등을 존중해 자연성에 근거한 생명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런 이성적인 가치관으로부터의 코페르스쿠니적 전회는 니체의 가치전도가 대표적이다. 또 딜타이는 생철학에 의거한 예술을 즐겨 논했다. 훌리오는 의사인데 노래를 잘 부르고 즐겨 부른다. 마그다는 그를 예술가로, 아르투로를 “나의 유일한 신”이라고 부른다. 다니에겐 수천 년 전 인간이 신을 만들었음을 가르친다.

아르투로는 다니에게 “자식에 대한 엄마의 사랑과 그 사랑을 돌려주는 자식의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고 가르친다. 이 영화의 주제다. 마그다는 “삶을 믿지.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야 해. 자신과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라고 가르친 뒤 전남편을 불러 화해한다. 또 다른 주제다.

원제와 전혀 다른 ‘내일의 안녕’이란 한국 개봉 제목은 생철학에서 실존주의로 넘어간 즈음의 하이데거의 냄새가 풍긴다. 내일은 죽음 혹은 사후세계를 뜻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살아있는 자)가 본래적 존재(육화되기 전의 영혼)로 되돌아가 결국 도래적 존재(사후의 영혼 존재)가 된다며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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