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장준하 의원과 뜻하지 않은 유럽여행문 장군은 차지철씨와 인연을 쌓기 전에 김재규씨와도 인연을 맺었다. 차와 김은 3공화국내내 숙명의 라이벌 관계로 지냈다.문 장군이 육본 인사참모부 인사관리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1968년 3월 어느 날 김재규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아침 자신의 집에서 조찬을 하자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전화에 문 장군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문 장군은 성북동 김 사령관의 자택을 방문했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청와대 외곽 적 2개사단이 들어와도 끄덕없겠지”계속되는 그의 증언이다.“본격적인 국기강하식은 경호실의 위상을 한껏 올려놓은 1976년부터 시작됐다. 차 실장은 청와대의 경호위력 증강에 대해 거의 광신적일 만큼이었다. 어느 날 차 실장은 청와대 외곽경비상태를 점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면 적 2개 사단이 쳐들어와도 끄덕없겠지.’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청와대 외곽철책에 동물이 부딪친 ‘오접사건’이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1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청와대 외곽경호 군병력이 맡아수경사 예하 경복궁의 30경비단은 청와대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그 동안 숱한 화제를 뿌려왔으며 우리 현대사의 격랑만큼이나 많은 비화와 야사를 간직하고 있다. 1979년 12.12사건 당시만 하더라도 30경비단(단장 장세동 대령)은 전두화, 노태우 소장, 차규헌(車 圭憲), 황영시(黃永時) 중장 등 이른바 신군부측의 핵심들이 모여 10.26으로 빚어진 권력공백의 상태에서 현대사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꾼 ‘역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1.21사건 “무장공비를 소탕하라”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수많은 사건이 벌어졌지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두 가지 을 꼽으라면 무엇일까. 그 첫 번째는 1968년 1월21일에 발생한 북한의 무장공비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고 두 번째는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벌어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일 것이다.특히 1.21사건으로 허를 찔린 박 대통령은 “어떻게 청와대 앞까지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라는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3선개헌안 통과 시나리오는 이후락 작품그러나 3개월 뒤인 1969년 9월14일 3선개헌안은 국회에서 변칙통과됨으로써 10월17일 국민투표를 거쳐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육 여사가 그토록 반대했던 3선개헌안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배경을 잠깐 되짚어보자.3선개헌이 최초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쯤이었다. 아직 박 대통령이 재선임기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다. 이 때 측근에서는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짓고 이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육사의 대사건, 문학사 과정을 신설하다김 장군은 군단장 임기 2년을 채우기 전에 육사교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는 이때 두 가지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나는 교과과정을 개편해 ‘이학’ 위주에서 ‘문학’ 과정을 새로 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육사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로서 일대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김 장군은 “육사의 교과목은 대부분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모방했다. 웨스트포인트는 또 미공병학교의 후신이었다. 따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경제개발 프로젝트 역공작3개월 뒤 김 장군은 예정보다 3주일 앞서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김 장군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여의도에 장차 한국의 과학기술을 이끌어갈 ‘두뇌센터’의 청사진을 그려보며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 장군은 곧바로 청와대로 달려갔다.“김 장군, 어서 오시오.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요?”김 장군을 맞이하는 박 대통령의 표정이 환하게 밝았다. 사실 박 대통령은 계속된 6.3시위의 후유증으로 고민하던 중 모처럼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최고회의 940일만에 해체하다1963년 후반기의 정치상황은 급변 그 자체였다. 10월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당선된 한 달 뒤인 11월26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박 의장이 이끄는 공화당이 압승을 가뒀다. 이어 12월17일 제6대 국회 개원과 함께 새 헌법이 발효됨으로써 파란의 제3공화국이 공식 출범하기에 이르렀다.이보다 하루 앞선 12월16일 오후 2시 정각. 최고회의청사(지금의 미대사관 옆 공보처 건물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대선에 지면 우리는 몽땅 형무소행여기에서 김 장군은 앞서 얘기한 내용, 즉 김형욱씨가 김재춘씨에 이어 어떻게 중정부장으로 부임하게 됐는지 그 내막을 보다 자세하게 밝힌다.1963년 7.6사건(중정에 의한 공화당 지지세력 암살기도 사건) 직후 박 의장은 그 책임을 물어 김재춘 부장을 전격 해임시켰다. 이튿날 오전 김 장군의 정책자문역 이재만씨가 허겁지겁 찾아왔다.“위원장님, 방금 신임 중정부장이 신고하고 갔습니다.”김 장군이 눈을 동그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재벌기업회장의 이상한 방문1963년 9월,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 등이 출마한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고조될 무렵 김희덕 장군은 최고회의 외무, 국방위원장에서 재경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모기업 회장이 인사차 찾아왔다. 당시 재경위원장의 위치면 국내 재벌은 물론 경제계를 주무르다시피 했다.김 장군이 모회장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모회장은 인사를 건네는 자리에서 “위원장님, 위원장님은 저희와 사돈지간입니다.”라고 말했다.“아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5.16거사 성공후 많은 시련을 겪었다. 최고회의 내부분열도 있었고 미국측의 반대, 기존의 정치인들과 시시비비 부딪히면서 집권가도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박 의장은 어떻게 해서 여러가지 난관을 뚫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다음은 당시 김희덕 장군이 주도로 박정희 의장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극비 시나리오 중 주요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정당문제(박 의장을 대통령으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갈수록 권력암투 치열이와 관련해 김 장군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두 번의 암살위기를 넘겼다고 밝혔다. 첫 번째는 앞에 언급한 대로 김재춘 중정부장이 주도했던 공화당 지원세력 제거대상에 포함된 것이고 두 번째는 1963년 3.16성명 직후 김형욱씨에 의해 암살대상자로 분류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 장군을 없애려던 김재춘 부장은 계획이 탄로나자 중정부장직을 내놓아야 했고 이보다 앞서 김 장군을 암살하려던 김형욱씨도 나중에 김 부장한테 암살당할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공화당 지원세력을 암살하라”이와 비슷한 사건은 또 하나 벌어졌다. 공화당 해체를 기정사실화 했던 김정열(金貞烈) 공화당의장은 이미 발표문을 작성하고 기자들까지 불러들인 상태였다. 김 의장의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김 의장은 며칠 뒤 의장직에서 물러나 주미대사로 부임했다). 일이 이쯤되자 이훈섭(李勳燮) 최고위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공화당 해체작업을 주도한 모씨한테 달려가 완력으로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이로부터 약 두달 뒤 김 장군은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정치자금 10억원 확보 비밀계획5.16 이후 1963년 10월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박 의장은 실로 살얼음판을 걷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최고회의 내부의 동요를 비롯 공화당파와 반공화당파 간의 암투, 군정을 반대하는 미국측의 압력 등 어려운 일들이 계속 터져나왔기 때문이다.이런 와중에 김 장군은 박 의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다. 김 장군은 한때 박 의장과 하숙을 같이 할 정도로 절친한 친구 사이인데다가 인간적인 신뢰감을 쌓고 있는 터여서 박 의장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박정희 의장에게 전달되는 1급 비밀메모-김희덕 장군 증언최고회의 내부는 혼란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김희덕 장군은 정국의 추이와 전망 등에 대해 매일 매일 박 의장에게 보고를 했다. 1급비밀로 분류된 메모형식의 보고서는 박정희 의장만 보도록 돼 있었다. 김 장군은 이 보고서 한 부씩을 보관해 두었다가 1974년 5월 전역한 뒤 자신의 일기장에 일일이 옮긴 후 파기했다. 김 장군은 “당시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역사의 와중에서 겪었던 ‘진실’을 밝히는 것도 의미있는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1963년 3월15일 밤, 운명적인 사건-김희덕 장군의 증언5.16 거사 2년 후인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1963년 2월27일 민정이양을 발표한다. 미국측은 때를 놓칠세라 3000만달러 원조계획을 조기에 실행하겠다며 미국무성 관계자들을 한국에 급파했다. 이들은 한국 도착 직후인 3월15일 저녁 한국측 관계자들과 처음으로 저녁 식사자리를 가졌다. 민정이양을 축하하는 뜻에서 미국측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러나 이 날 저녁 한국 현대사의 물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5.16 직후 최고회의 경호실 핵심요원으로 발탁된 이 대위는 청와대 초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소령과 함께 경호실 창설작업을 주도해나갔다. 이 대위의 직책은 경호실 기동반장이고 박 소령은 경호대장이었다. 이상훈 장군의 회고.경호실의 기본조직은 여러 나라의 것을 참고로 했지만 주로 백악관 경호시스템을 많이 모방했다. 당시 내가 받은 직책은 기동반장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청와대 경호실 수행과장 정도라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박정희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육사교장 권총위협과 육사생도의 가두행진-이상훈 장군 5.16거사 전 JP와의 운명적 만남이상훈 장군은 대위때인 1959년 10월 군사정보부대 번역장교를 지내다 이듬해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 파견근무를 나가게 된다. 여기에서 5.16때 핵심 중 핵심인 김종필(JP) 중령과 같이 근무하게 된다. 1961년 5.16거사 직후 육사생도들이 가두행진에 참여하게 되는데 누가 어떻게 해서 행진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이에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연재를 시작하면서장강(長江)은 뒷물이 앞물을 세차게 밀치며 도도히 흐른다. ‘삼국지’의 첫대목에 나온다. 새 시대가 구시대를 밀쳐낸다는 역사의 강을 뜻하는 것일 게다. 술잔에 먹구름이 드리우면서 ‘오호통재!’라 외마디를 읊으며 새로운 바람에 의해 스러져가는 역사의 그림자를 말하기도 한다.우리나라의 현대사도 이 말에 크게 다름이 없다. 격동의 바람이 세차게 불기도 했고 격랑의 파고가 연이어 생겨나곤 했다. 그 속에 많은 인물들이 동분서주 우왕좌왕 뛰어들었고 홀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