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언노운’(2011)은 ‘하우스 오브 왁스’, ‘오펀: 천사의 비밀’의 자움 콜렛 세라 감독이 관객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리는 반전 액션 미스터리다. 미국의 마틴(리암 니슨) 박사는 아내 리즈(재뉴어리 존스)와 함께 생명공학정상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위해 베를린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간다.

체크인하려는 순간 서류 가방 하나가 빠진 걸 깨달은 마틴은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간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택시는 강에 빠지고 운전기사 지나(다이앤 크루거)가 기절한 마틴을 구해준 뒤 홀연히 사라진다. 나흘 만에 병석에서 의식을 차린 마틴은 국소적 기억상실증을 호소하며 말리는 의사를 물리치고 퇴원해 호텔로 간다.

마침 축하 행사 중이었는데 리즈는 마틴을 몰라본다. 더 놀라운 일은 생면부지의 남자가 자신의 이름표를 달고 리즈와 다정하게 부부 행세를 하고 있다. 마침 추수감사절이라 대사관은 휴무 중이었고, 여권을 잃어버린 상황인 그는 친구 콜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 메시지를 남기는 한편 현지에서 만나기로 한 브레슬러 박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호텔에서 본 또 다른 마틴을 발견한 마틴은 설전 끝에 기절해 다시 그 병원으로 실려 간다. 간호사 헤르첸은 쪽지에 동독 비밀경찰 출신 탐정 위르겐의 주소를 적어준다. 그런데 병원에 한 괴한이 들이닥쳐 헤르첸 등을 죽인 뒤 마틴을 납치하려 한다. 마틴은 가까스로 탈출해 위르겐을 만난다.

위르겐은 공항 지인을 통해 입국하는 마틴의 CCTV 영상을 확보한다. 마틴은 비코라는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를 통해 역시 보스니아 불법 이민자인 지나를 찾아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한다. 그런데 병원에 잠입했던 괴한이 동료와 함께 그 집을 습격하고 두 사람은 간신히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과연 마틴의 진짜 정체는 뭣일까? 괴한들은 왜 그를 죽이려 하는가? 며칠 전까지 다정했던 리즈는 왜 마틴을 모른 체하는 것일까? 마틴은 진짜 마틴이긴 한 걸까? 분명히 영화의 인트로는 비행기 안에서 마틴과 리즈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관객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틴의 진짜 정체에 대해 의심하게 될 것이다.

마틴이 초대받은 행사는 인류의 식생활과 경제활동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수 있는 발표회였다. 브레슬러 박사가 제초제 저항성 슈퍼 옥수수를 개발해 이를 발표하기 직전이었고, 그와 절친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샤다 왕자는 그 행사의 후원자였던 것. 샤다는 진보주의자라 자국 극단주의자들의 암살 표적이었다.

그렇다면 괴한들은 사우디 극단주의자 혹은 그들의 사주를 받은 프로 킬러들일까? 그렇다면 왜 그들은 마틴을 죽이려 했을까? 마틴은 샤다에게 근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 근거에 의해 샤다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는 마틴을 제거한 후 다른 인물을 마틴으로 꾸미면 암살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런데 새 마틴의 신분이 완벽하다는 것이다. 리즈와 함께 찍은 결혼사진과 여권이 멀쩡하고 인터넷 랭모어 대학 홈페이지엔 새 마틴의 얼굴이 당당하게 걸려있다. 구 마틴은 ‘남들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내가 싸우고 있다’며 괴로워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새 마틴의 신분이 확실해질수록 자신의 기억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혼란스러운 것.

여기에 이 영화의 말미에 드러나는 엄청난 반전의 열쇠가 있다. 점잖은 대학교수가 등장하는 액션이라 초반에는 격투 신 등이 어색하다. 하지만 갈수록 액션의 강도가 강해지고 반전이 드러난 후의 액션은 니슨 특유의 과장되지 않은 느림의 미학이 펼쳐지는데 특히 지나의 활약이 볼 만하다.

기억에 관한 영화는 많다. 미스터리 장르에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메멘토’가 있다면 멜로 장르에선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이 걸작으로 손꼽힌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므두셀라 증후군 같은 이기적, 주관적 인식론과 유사한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선 두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는 현존하는, 혹은 입증되지 않은 비밀결사 조직을 인식하고 산다. 실존하는 마피아부터 확신은 서지만 증명하기 힘든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같은 조직이다. 이 작품은 섹션15라는 강력한 국제적 킬러 단체를 상정한다. 조직 내에서 가장 유능한 한 요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에 넌더리가 났다.

클레멘타인과의 아픈 이별을 잊고 싶었던 조엘(‘이터널 선샤인’)이나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지우고 싶었던 레너드(‘메멘토’). 레너드가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선 ‘셔터 아일랜드’의 래디스를 연상케 한다. 위르겐은 “독일인은 잊는 데 명수”라며 나치의 만행도 쉽게 잊었다고 비난한다. 힌트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 환상을 현실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조언도 같은 맥락.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와 플라톤의 ‘침대’, 그리고 ‘장자’의 ‘호접몽’은 이미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를 통해 수많은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다소 식상할 수도 있지만 기억이 관여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면도 있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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