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내일도 우린 사랑하고 있을까’(저우난 감독)는 대놓고 기억을 소재로, 겨울을 배경으로 한 멜로라는 점에서 미셸 공드리 감독의 걸작 ‘이터널 선샤인’을 연상케 하는데 매우 귀엽게 시작해 ‘쿨’하게 매조지는 미덕이 돋보인다. 3년 차 회사원 페이리(리홍치)는 소심한 성격이라 사내에서 존재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IT 엔지니어이지만 택배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그는 스스로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으면 구석에 처박아 두는 공구맨’이라 부를 정도다. 미모의 시만(안젤라베이비)이 첫 출근해 고장 난 컴퓨터 때문에 곤란해하자 그가 손쉽게 고쳐준다. 그 후 1년 넘게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짝사랑을 키워간다.

시만에겐 사귀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웬일인지 표정이 어둡고 때론 눈물까지 흘린다. 임직원들은 박람회 참석차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출장을 떠나고, 일정이 끝나자 대표는 출장 탓에 휴가를 못 간 직원들을 위해 핀란드 헬싱키로 특별 여행을 마련해 준다. 오로라 보는 게 소원이던 시만은 버킷리스트를 짠다.

대표의 제안으로 예정보다 일찍 헬싱키를 떠나 따뜻한 남프랑스로 가게 되는데 웬일인지 시만만 홀로 남게 된다. 그러자 페이리 역시 슬쩍 행렬에서 이탈해 잔류한다. 그날 밤 시만은 스키장 꼭대기로 올라가고, 악천후 속에서 실종된다. 페이리는 사람들을 동원한 끝에 기절한 시만을 찾아낸다.

깨어난 그녀는 단기성 기억상실 증세를 보인다. 이름, 집 주소 등 기초적인 건 기억하지만 회사는 물론 페이리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자 페이리는 자신이 더우펑이란 시만의 애인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전날 오로라를 보고 하루만 시만의 애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게 들어맞는 듯해지는데.

페이리는 그야말로 ‘루저’다. 외모가 뛰어난 미남도, ‘근육맨’도 아니다. 패션 센스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화려한 언변도, 지식도, 교양도 못 갖췄다. 성격까지 소극적인 데다 피해의식마저 엿보인다. 오죽하면 회사 선배들 중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기술자가 하는 일이 택배 물품 분배라니.

시만은 뛰어난 미모와 늘씬한 몸매로 완벽한 외모인 데다 일도 잘하고 성격도 활발해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다. 페이리는 입사 후 3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로부터 이름을 불린다. 시만은 처음엔 주차가 힘들다며 투덜대지만 이후 일찍 출근해서인지 손쉽게 주차한다. 엘리베이터에선 좋아하는 올드 팝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페이리가 그녀보다 더 빨리 출근해 다른 운전자에게 욕먹어가며 주차 자리를 확보해뒀고, 로비 직원에게 로비를 해 특정 노래를 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시만은 끝내 알지 못한다. 헬싱키에서 페이리의 소원대로 두 사람은 하루 동안 그 어느 연인보다 달콤한 추억의 앨범 한 권을 만든다.

산타 마을에서 동심으로 되돌아가보기도 하고, 손수 개썰매를 끌어 곰 출몰 지역까지 달리기도 하며, 산타들이 사우나 뒤 얼음물 속에 들어가는 걸 보고 흥분해 함께 뛰어들기도 한다. 게다가 산타가 만든 반지 사탕을 손가락에 걸며 모의 결혼식까지 해본다. 이 영화를 본 연인들이라면 당장 핀란드로 달려갈 만큼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데이트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기억과 공구, 즉 인간과 컴퓨터(테크놀로지)다. 페이리는 시만에게 ‘컴퓨터는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처음엔 이해 못 했던 시만은 기억을 상실한 뒤에야 그걸 기억해 내고 깨닫는다.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는 대뇌피질이고, 회로는 중추신경계다. 노골적으로 마셜 매클루언의 주장을 빌려왔다.

테크놀로지 결정론자 매클루언은 테크노필리아와 테크노포비아의 논란을 야기한 문제아다. 본인은 낙관론적으로 전자를 주장했지만 그에게 반기를 들어 사사건건 발목을 붙잡았던 장 보드리야르는 후자 쪽이었다. 사이버펑크는 ‘컴퓨터는 인간 중추신경계의 외화’라는 매클루언의 테제를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받아들인다. 온몸을 기계화하고 심지어 뇌까지 전뇌로 대체하는 ‘공각기동대’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 정도로까지 과하게 나아가진 않는다. 귀엽고, 예쁘며, 감동적이기 위해 사이보그나 복제인간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으니까. 컴퓨터와 스마트폰이면 충분하다. ‘메멘토’의 쉘비는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문신을 하고,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은 어제의 기억을 지운다. 그녀를 잊으려는 조엘 역시 그 시술을 받지만 뒤늦게 후회하고 기억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쉘비와 조엘에 비해 시만의 기억 저장은 매우 쉽다. 스마트폰에 동영상을 녹화하면 되는 것. 스마트폰은 미디어고 인터페이스다. 페이리는 테크놀로지 전문가고 각종 공구를 대체할 만한 기술자다. 그는 페이리가 스마트폰에 녹화한 자신에 대한 추억을 그녀가 잠든 새 지운다. 소유를 포기하면 상실이 없어지고, 집착을 내려놓으면 후회와의 인연이 사라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자신만의 에베레스트, 즉 모험(위험)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일을 감수하곤 한다. 그건 올드팝 CD를 수집하는 그녀의 취미와 일맥상통한다. 좋아하는 건 손에 쥐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를 좋아한다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감상하는 건 의미가 없다. 직접 밟고 직각적으로 느껴야 한다.

시만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윌리 넬슨 버전의 ‘Always on my mind’다. 연인과 헤어지고 난 후에야 그녀를 충분히 사랑해 주지 않은 걸 깨닫고 후회하는 내용인데 페이리의 넘치는 사랑에 대한 반어법이자 더우펑의 성욕에 불과한 거짓 사랑을 빗댄 것. 리는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차태현) 같은 백치미가 매력적이다. 천편일률적이지 않아 상큼한,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격조 있는 멜로다. 1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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