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칸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경합했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셀린 시아마 감독, 2019)은 겉으로 보면 퀴어 무비지만 알고 보면 아직도 잔존한 ‘메일 게이즈’(남성적, 이성애적인 여성의 대상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더불어 여성의 자립성과 독립성을 주창하는 강렬한 테제가 빛나는 아트버스터다.

18세기 프랑스 한 외딴섬. 백작 남편을 여의고 홀로 두 자매를 키우는 부인은 정략적 중매결혼으로 첫딸을 결혼시키려 하다가 잃는다. 부인은 둘째 엘로이즈(아델 에넬)를 자신의 고향 밀라노로 시집보내기 위해 초상화를 마련하고자 화가를 부르지만 결혼을 거부하는 둘째는 화가에게 얼굴도 안 보여준다.

부인은 그치지 않고 젊은 여성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를 부른다. 정체를 밝힐 경우 또 실패할 것이 뻔하기에 부인과 마리안느는 산책 친구라고 위장한다. 마리안느는 매일 엘로이즈와 산책하며 그녀의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한 끝에 결국 그림을 완성하고, 부인에게 그림을 엘로이즈에게 먼저 보여주겠다고 선언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사실을 고백한 뒤 그림을 보여준다. 그러자 엘로이즈는 자신과 하나도 안 닮았다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마리안느는 낭패감에 그림을 훼손한다. 분노한 부인은 마리안느에게 돌아가라고 화내지만 웬일인지 엘로이즈가 포즈를 잡아 그림 그리는 것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나선다.

부인은 허락하고 5일간의 여행을 떠난다. 두 사람은 하녀 소피와 함께 즐겁게 카드놀이를 하고, 마을 축제에도 참가하는 등 모처럼 자유와 행복을 만끽한다. 마리안느는 소피가 임신한 걸 알고 엘로이즈와 함께 낙태를 도와준다. 솔직해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어느덧 서로 사랑한다는 걸 깨닫는데.

배경은 1789년 혁명이 있기 전으로 추정된다. 당시 모든 건 남성중심적이었고, 여성은 단지 남성의 부속물이었다. 남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내조를 하고, 안정적인 섹스 파트너가 되며, 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주는 역할. 아니면 단순히 성적 대상이든가. 엘로이즈가 수녀가 될 것도 아닌데 3년간 수녀원에서 수업한 게 바로 그런 배경 때문.

그래서 억지 교육에 의해 고지식해진 그녀가 소유한 옷은 수녀원에서 입던 녹색 드레스 하나. 그녀는 마리안느와의 첫 산책 때 무작정 달리더니 수녀원에 있는 동안 그걸 꿈꿨다고 고백한다. 또한 “수영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사회가 양갓집 규수에게 정숙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니가 놓던 자수를 계속 이어간다. 언니는 자살 전 동생에게 마지막 편지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떠넘긴 것에 대해 사과했다. 엘로이즈는 나름대로 노래도 부르고 도서관에서 마음대로 책도 볼 수 있었기에 수녀원 생활이 좋은 점도 있었다고 술회한다. “무엇보다 평등해서 좋았다"라며.

그녀는 정략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인정하지만 마리안느는 단호히 결혼을 안 하겠다고 말한다. 첫 번째 그림 완성 후 마리안느가 떠난다고 하자 엘로이즈는 바다에 뛰어든다. 이렇듯 처음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통해 사회적 억압에 억눌렸던 자유와 의지를 배워 나간다.

그런데 정작 마리안느가 처음 완성한 초상화는 전혀 엘로이즈와 안 닮았다. 그저 전형적인 ‘신붓감 사진’에 불과했다. 마리안느의 아버지는 화가였고,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림을 출품하곤 했다. 그녀는 누드를 그리긴 하지만 여자만 그리도록 강제되고 있다. 사회가 여성 작가의 대작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리안느 역시 규칙과 관습에 길들여져 있었고, 규약과 제재에 순종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에 대한 엘로이즈의 혹평에 화가로서의 작가정신을 되찾는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폭풍을 경험한다. 하지만 외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이별이 앞당겨진다.

그리스 신화의 에우리디케를 색다르게 해석한 감독의 의도다. 세 여자는 대놓고 이 신화에 대한 토론을 벌인다. 음유시인이자 리라의 달인인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불려 죽자 지하세계로 가 하데스 등을 멋진 리라 연주로 감동시킨 뒤 아내를 되돌려 달라고 부탁해 허락을 받는다.

그러나 지상세계에 오를 때까지 뒤따라가는 아내를 바라보지 말라는 하데스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지상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뒤돌아보는 바람에 아내의 두 번째 죽음을 목도한다. 이는 얼핏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 본성의 조급함, 그리고 신에 대한 불신과 인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하지만 감독은 엘로이즈의 입을 통해 운명론과 여성의 자기주도적 의지를 부르댄다.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본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에우리디케의 유도였다고 말한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에게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라고. 만약 오르페우스가 그녀를 안 봤다면 삶은 속개됐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세계를 경험한 에우리디케는 지상의 삶이란 게 영원한 게 아닌 데다 여러 가지 풍파와 분란이 많은 데 대해 회의를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싫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추억 속에서 그가 죽기 전까지 젊고 아름다운 아내로 남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에우리디케를 노골적으로 차용한 건 그녀의 부활에 실패한 오르페우스가 낙담해 수많은 여자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다 결국 여자들에게 죽음을 당한 이후 동성애의 효시로 전승됐기 때문이다. 훗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와 헤어지는 에우리디케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림을 출품한다.

그건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추억’이라는 메시지다. 엘로이즈의 외딴섬은 고립된 여성을 뜻한다. 그런데 마리안느와의 사랑 때 그녀의 겨드랑이에서 털이 보인다. 마치 ‘여성들이여,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 대상화에서 주체화로 나아가자!’라고 외치는 듯하다. 알 수 없는 미래지만 가볼 것인가, 거부하고 현재에 안주할 것인가를 묻는다. 이제 41살인 시아마 감독의 향후 행보가 정말 기대되는 걸작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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