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뤽 베송이라고 하면 대부분 스칼릿 조핸슨이 맹활약한 ‘루시’나 망한 블록버스터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감독, 혹은 ‘택시’ 시리즈의 제작자를 떠올릴 것이다. 영화 좀 봤다고 하면 ‘레옹’부터 ‘제5원소’를 그릴 법하다. 그러나 그의 시그너처는 프랑스 누벨 이마주의 대표작 ‘그랑 블루’(1988)다.

1968년 그리스 해변 마을. 잠수에 능한 이탈리아 출신 소년 엔조가 골목대장 노릇을 하고, 그보다 2살 어리고 덩치도 작은 프랑스 소년 자크는 그에게 살짝 주눅이 들어있다. 자크의 홀아버지는 동생 루이와 함께 매일 잠수를 하며 생계를 꾸리는데 어느 날 두 가족이 보는 앞에서 바닷속에서 숨진다.

20년 후. 미국 뉴욕의 보험회사 직원 조안나(로잔나 아퀘트)는 페루 안데스산맥에 있는 미국 잠수 연구소로 로렌스 박사를 만나러 온다. 그곳에서 얼음을 깨고 호수에 잠수하는 자크(장-마르 바)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프랑스로 돌아온 자크 앞에 엔조(장 르노)가 나타나 열흘 후 시칠리아에서 세계 잠수 대회가 열리니 자신과 함께 참가하자고 권유한다.

뉴욕에 돌아온 조안나는 자크가 눈에 밟히던 중 로렌스 박사와의 통화에서 그가 시칠리아에 간다는 정보를 얻고는 상사에게 이탈리아에 문제가 생겼다고 거짓말을 하고 출장을 떠난다. 그렇게 재회한 두 사람은 데이트하러 공원으로 갔다 쇼를 위해 잡혀온 돌고래를 본다. 그날 밤 엔조까지 가담해 돌고래들을 훔쳐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렇게 자크와 조안나는 연인이 되고 조안나는 회사 때문에 뉴욕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 게 드러나 해고된다. 그러자 그녀는 지체 없이 짐을 싸 자크의 집으로 간다. 자크는 엔조와 그의 연인 보니타, 그리고 로렌스를 초대해 파티를 연다. 엔조와 자크는 계속 잠수 대회에 출전하는데 엔조가 신기록을 세울 때마다 자크가 그걸 깬다.

로렌스는 자크가 잠수 시 혈액이 팔이나 다리로 가지 않고 뇌로 몰리는 돌고래 같은 특이체질이란 걸 발견하고 엔조가 그의 기록에 도전하는 건 자살행위라며 대회를 중단시킨다. 그러자 엔조는 제멋대로 잠수하고, 뒤늦게 그걸 안 자크가 바다에 뛰어들어 구하지만 엔조는 눈을 감으며 “물속으로 보내달라"라고 애원하는데.

무려 168분의 러닝타임은 ‘어벤져스; 엔드게임’처럼 재미를 보장하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라면 웬만해선 견디기 힘든 장시간이지만 일단 아름다운 비주얼과 여러 나라를 넘나드는 여행 영화 같은 분위기 덕분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자크와 조안나의 사랑과 더불어 사실 그보다 더 돋보이는 자크와 엔조의 우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스토리와 플롯이다.

엔조는 죽을 줄 알면서 깊숙이 잠수한다. 자크가 구해온 엔조를 두고 의료진들이 부산을 떨지만 자크는 그들을 만류한 뒤 엔조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바닷속으로 보내달라는 그의 유언을 따른다. 조안나는 자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린 뒤 아이를 낳고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길 원한다며 붙잡고 애원한다.

하지만 자크는 바닷속에서 볼 게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자 조안나는 그를 보내준다. 왜 엔조와 자크는 죽을 줄 알면서 바닷속 깊이 잠수하는가? 루이는 어린 자크에게 “네 엄마는 떠난 게 아니라 고향 미국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빠르게 변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된 자들의 자유 희구와 회귀본능이다.

엔조는 잠수기록 세계 챔피언이다. 덩치도 크고 자기주장이 강해 신기록을 세우곤 메달 수여식에 참석하라는 주최 측의 부탁을 거부한다. 친구들과 파티하기 위해. 그만큼 자존감이 강하지만 사실 그는 여리다. 항상 동생 로베르토를 브레인으로 대동하고 다녀야 제구실을 하고, 엄마를 무서워해 연애도 제대로 못 한다.

자크는 말수가 적다. 감정 표현도 서투르다. 매우 내성적인 성격인 그는 돌고래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가 웃고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는 바다에서 돌고래들과 놀 때가 유일하다. 둘은 변변한 직업도 없다. 간신히 석유시추선에서 일하는 기회를 잡지만 규칙에 서툴러 해고된다.

잠수 대회 파티 때 자크는 엔조가 구해준 턱시도를 억지로 입지만 신발은 아디다스다. 두 사람은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된 주변인이다. 자크는 바닷속에 있을 때 가장 힘들다고 한다. 물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다는 그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자궁이자 아버지의 안식처니까.

존재의 이유를 넘어 ‘어디에 어떻게 있는 게 실존인가?’를 묻는다. 자크와 엔조에게 바다 밑은 땅 위에서 느끼는 심연의 고뇌와 지진 같은 어지럼증을 해소할 수 있는 하늘 같은 공간이었다. 마지막에 조안나는 자크에게 토하듯 임신을 외치지만 그는 외면한다. 그에게 연인과 자식은 거북한 사치일 뿐 바닷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엔조의 영혼을 담은 돌고래를 만나는 게 외려 현실이었다.

숱하게 봐왔기에 새로울 것도 없는데 “가서 봐야 할 게 있다"라고 말한 배경이다. 어릴 때 자크는 아버지가 매일 잠수하는 걸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걱정 마. 인어가 구해줄 것”이라고 응대했다. 자크는 깊은 곳에서 극강의 고통을 느낄 때쯤 인어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인어를 만난다는 건 차안의 세계를 초월해 피안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바다 밑 깊은 곳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우리는 미래를 모른다. 다만 언젠가 머지않아 죽는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래서 알 수 없는 미래지만 가 보고 싶어 한다. 아니, 싫어도 저절로 가게 돼있다. 현실엔 제약이 많다. 석유시추선 노동을 할 때 엔조는 잠수정 안에서 담배를 물었다가 직원의 제지를 받자 그냥 물고만 있는 것이라고 응수하지만 그것도 금지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러자 그는 “여기서는 소변보는 게 금지지만 내 몸엔 소변이 있다”라는 명언으로 맞선다. 자크와 엔조에게 규제가 많고, 많은 규칙을 요구하는 이 세상은 불편하다. 그들에게선 중앙 집권뿐만 아니라 다수의 전제를 경계했고,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지 않도록 민주주의의 제도적 개선을 요구했던 존 스튜어트 밀이 보인다. 숨을 참고 죽은 디오게네스도 보인다.

언제나 명작의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의 명불허전 서사시다. 엔조가 난파선에 갇힌 사람을 구한 뒤 사례비로 받은 1만 달러란 큰돈으로 고작 낡은 차의 도색을 한다든가, 엔조와 자크가 수영장 파티 때 잠수 경쟁을 하다 병원에 실려가는 등의 유머도 있다. 수영장에 잠수해 술을 마시는 시퀀스와 자크의 방의 천장에서 바닷물이 쏟아지는 시퀀스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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