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상업영화의 구문론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감독 데뷔작 ‘열혈남아’ 이외에는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거의 없지만 마니아층의 절대적인 지지만큼은 웬만한 흥행 감독이 부럽지 않다. ‘타락천사’(1995)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불친절한 아트 무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난해하다.

킬러 황(리밍-여명)은 청부 살인업자다. 그의 동업자인 파트너(리자신-이가흔)는 창녀다. 둘은 함께 일한 지 155주나 됐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파트너는 황의 집을 청소한 뒤 쓰레기들을 가져와 그의 흔적을 가슴에 쓸어 담으며 연정을 품게 된다. 일을 그만두고 싶은 킬러는 단골 바에 그녀에게 전할 메시지를 주크박스의 노래로 남긴다.

지아(타케시 카네시로-금성무)는 감방에서 탈옥해 호텔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아버지는 대만 태생이지만 아내가 아이스크림 차에 치여 죽자 지아가 5살 때 홍콩으로 왔다. 지아는 그때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의 파인애플을 먹는 바람에 목소리를 잃었다. 그는 한밤에 문 닫은 남의 가게에서 장사를 하며 산다.

체리(양차이니-양채니)는 연인 조니의 결혼 관련 전화를 받고 자신이 신부인 줄 알고 기뻐하지만 신부가 ‘절친’인 걸 알고 절망과 분노에 빠진다. 마침 옆에 있던 지아에게 기대 울고, 지아는 그녀에게 강렬한 연정을 품는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원수인 친구를 찾기 위해 밤거리를 헤맨다.

킬러는 쏟아지는 비에 흥분한 펑키(모원웨이-막문위)를 우연히 만나 그녀의 집에 간다. 펑키는 둘이 아는 사이라고 하지만 킬러는 기억이 없다. 둘은 불같은 사랑을 했다, 식어버린 재처럼 돌아선다. 파트너는 우연히 길에서 펑키와 마주친 뒤 낯익은 한 남자의 향수 냄새를 맡는다. 지아는 조니를 못 잊는 체리에게 결국 실연당하는데.

여명이 트는 마지막 신을 제외하면 화면은 내내 어둡다. 카메라는 고정되지 않은 채 줌 인과 줌 아웃을 넘나드는가 하면 핸드 헬드 기법에 의해 상하좌우로 움직이고 오블리크 앵글도 잦다. 전체적으로는 와이드 앵글 렌즈로 진행된다. 인물이 가까이 있어도 멀게 느껴지는 이 효과는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둔 시민들의 불투명한 미래, 서로 멀기만 한 관계를 뜻한다.

킬러가 파트너를 안 만나는 이유는 업무에 감정이 개입되면 일을 망치기 때문이다. 삭막한 자본주의에 물들었지만 결국 사회주의 체제가 잔재한 중국에 흡수돼야 하는, 이도 저도 아닌 홍콩의 정체성을 말한다. 킬러는 중심을 잡으려는 이성주의자이지만 파트너는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는 감성주의자다.

그녀는 킬러의 침대에서 그의 체취를 맡으며 자위행위를 하는가 하면 그의 단골 바의 그의 지정좌석에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홍콩 사람들은 영국에도, 중국에도, 자본주의에도, 사회주의에도 확실하게 소속되지 못한 떠도는 섬이다. 이 영화는 기억의 유통기한과 감정의 유통기한에 관한 얘기다.

지아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먹음으로써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낙천적이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그가 택한 건 캠코더로 아버지를 찍는 일이다. 뭔가 기록을 남김으로써 기억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말은 내 의사의 전달 매체이자 내 의식과 정신의 전승 수단이다. 그 말을 잃었으니 영상으로 할 수밖에.

아버지가 환갑 직후 눈을 감자 그는 말한다. “아버지가 만든 스테이크를 다시 먹을 순 없지만 그 맛은 못 잊을 것”이라고. 그가 체리를 사랑하자 노란 머리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연을 당하고 나자 도로 검은색으로 회귀한다. 펑키는 노랑머리로 염색을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못 잊게끔.

그 대상은 아마도 킬러였을 것이다. 그녀를 베이비라고 부르며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떠나간 뒤 잊고, 재회했지만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킬러. 킬러가 두 번째 이별을 선언하자 펑키는 그의 팔을 문다. 제 얼굴은 잊어도 물린 사실은 기억할 테니. 그제서야 절대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킬러.

지아는 체리를 처음 만난 게 아니었다. 여러 번 만났지만 체리는 그를 매번 몰라봤고, 결과는 항상 지아가 실연을 당하는 것. 지아는 아버지 사후 새 삶을 살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이자카야의 조리사로 취업했지만 사장이 일본으로 귀국하자 다시 한밤에 남의 가게에 무단 침입해 영업을 한다.

어느 날 체리는 말끔한 제복 차림으로 나타나지만 지아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했냐는 듯 새 연인과 함께 함박웃음을 짓는다. 킬러는 지아의 이자카야에 갔다 좋은 인상을 받고 단골이 되려고 마음먹었지만 자신이 마지막으로 파트너에게 이별의 의미로 들려줬던 노래가 나오자 발길을 끊는다.

킬러는 뒤늦게 마지막으로 파트너를 만나 자신의 의사를 전한다. 파트너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청부 살인을 의뢰하는데 그건 바로 배신감에 친 덫이었다. 그렇게 킬러가 죽자 그녀는 파트너 사이에는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 후 다시는 쓰레기 검사를 안 한다. 감정이 생기면 안 되니까.

이 영화의 절반은 킬러가 파트너에게 들려주려 했던 콴슈이(관숙이)의 ‘망기타’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겐 영화 ‘첨밀밀’의 주제곡으로 유명한 덩리쥔(등려군)의 오리지널을 더욱더 블루지하게 편곡해 처연하고 처절한 느낌을 극대화한 이 곡은 영화의 그 어떤 내용보다도 오래 남을 듯하다.

왕 감독의 전매특허인 스텝 프린팅 기법, 광각 렌즈에 담은 레드와 옐로 계열의 과장된 색채의 향연이 모노톤과 어우러진 화면, 그리고 주인공들의 허무주의로 완성한 탐미주의는 왜 그가 동양 최고의 아트 무비 작가인지 여실히 증명해 준다. 주인공들은 그(녀)를 기억해야 하는 걸 잊었다. 또 그(녀)와의 추억을 담은 기억의 술잔도 잃어버렸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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