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오는 8일 재개봉되는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는 영국 비밀정보부 출신으로 스파이 소설의 대가인 존 르 카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 소설을 ‘렛 미 인’(2008)으로 유명한 스웨덴 출신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이 연출해 스파이 장르물의 품격을 한층 높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1973년. 영국 정보부 서커스의 국장 컨트롤(존 허트)은 은밀하게 요원 짐(마크 스트롱)을 불러 소련의 지배를 받는 헝가리의 한 장군의 망명을 도우라고 부다페스트에 보낸다. 장군이 서커스 수뇌부에 잠복한 두더지(소련의 이중간첩)의 정체를 알기 때문. 컨트롤은 두더지가 서커스 수뇌부 5인 중 한 명이라고 확신한다.

컨트롤은 퍼에게 팅커, 빌(콜린 퍼스)에게 테일러, 로이에게 솔저, 토비에게 푸어맨, 스마일리(게리 올드만)에게 베거맨이라는 암호명을 각각 붙이고 짐에게 두더지의 암호명을 알아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건 소련의 함정이었다. 짐은 소련 요원에게 사살된다.

컨트롤은 해고되고 스마일리는 레이콘 차관의 호출을 받는다. 서커스를 배신하고 잠적한 리키(톰 하디)로부터 전화를 받은 차관은 가장 믿을 만한 스마일리에게 모든 진상조사를 맡기려고 결심한 것. 스마일리는 리키의 직속상관 피터(베네딕트 컴버배치), 은퇴한 조사관 멘델과 팀을 구성한다.

전직 요원 코니는 러시아 문정관 폴리아코프가 두더지를 관리하는 소련의 베테랑 요원 카를라의 직속 요원인 정황을 파악, 퍼시와 토비에게 보고했지만 외려 잘못된 정보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제리는 부다페스트 사건 당시 당직 근무 중 규정대로 비상연락망을 가동했는데 그때 가장 먼저 달려와 조치를 취한 사람이 빌이라고 각각 스마일리 팀에 귀띔해 주는데.

다수의 스파이 스릴러가 음향 효과와 액션 신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의외로 그런 치장이 많지 않다. 외려 잔잔하고 담담한 연출의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빠른 전환의 편집으로 스릴러의 분위기를 만끽하게끔 만든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캐릭터를 잘 숙지하는 게 감상 포인트.

카를라는 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매우 중요한 열쇠다. 스마일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 포로로서 카를라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카를라는 소련에 송환될 경우 배신자로서 처형될 것을 우려했고, 이를 이용해 스마일리는 전향을 권유했지만 실패했다.

카를라는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던 것. 결국 그는 진정성을 인정받아 KGB의 핵심이 돼 영국 정보부에 두더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복선이 이곳저곳에 혼재해 있어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재미를 만끽하기 쉽지 않다. 스마일리는 피터가 빼낸 정보부의 재정 자료에서 죽었다던 짐이 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있고, 그의 계좌에 수천만 원의 돈이 입금된 것을 확인한다.

과연 짐이 두더지인가? 아니면 최소한 연관이 있을까? 총에 맞은 짐은 치료를 받아 생명을 건졌지만 카를라의 모진 고문에 딱 하나 두더지에 관한 정보만 빼고 다 털어놨지만 카를라는 그마저도 알고 있었다. 웬일인지 카를라는 짐을 풀어줬다.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처리된 그에게 토비가 돈을 대주면서 팅커, 테일러, 솔저, 푸어맨, 베거맨은 모두 잊으라고 했다.

스마일리 팀은 헝가리 전쟁난민 태생인 토비를 붙잡아 헝가리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함으로써 팅커, 테일러, 솔저, 푸어맨 4명 전원이 소련과 살짝 연관이 있다는 정보를 획득한다. 과연 토비가 두더지일까? 아니면 그의 하수인일까? 컨트롤이 지목한 자들 중에 두더지가 있을까?

양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승리했는데 특히 2차 대전은 미국을 단숨에 지구촌의 헤게모니를 쥔 부자 나라로 부상시켰다. 각각 나치 퇴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과 미국이 기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 따라서 당시는 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의 이념 대결이 첨예했고, 사람들은 무조건 이분법적 논리 안에서 처신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거기도 여기만큼 가치 없는 곳’, ‘서방세계는 타락했다’는 대사가 미국과 그 편에 선 유럽, 그리고 그들과 대척점에 선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 어느 곳도 비정치인에겐 불편하긴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프랑스의 ‘벨 에포크’와 ‘똘레랑스’는 유럽의 정서에 매우 교훈적으로 기능한다.

전자는 프랑스의 정치적 격동기가 끝난 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좋은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후자는 관용정신을 뜻한다. 그런데 2차 대전 후 유럽 사회엔 이런 정신이 사라졌다. 좌 아니면 우,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흑백논리와 진영의 논리로 꼭 편을 갈라야만 직성이 풀리게 된 것이다.

하다못해 객관식 시험의 선택지조차 4개나 되는데 운신의 폭을 단 2개 중에서의 선택으로 강요당하는 현대인에게 정치는 지나치게 잔인할 따름이라는 얘기다. 씁쓸한 결말로 끝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경쾌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La mer’(바다)가 흐르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게 인생이라는 아이러니다.

올드만의 연기력은 거론이 새삼스러울 만큼 보증수표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특히 강렬하게 빛을 발한다. 게다가 화려한 출연진인 만큼 절대 후회 없을 선택인 건 이미 검증된 상황. 인간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다. 이념과 체제는 사람이 만들지만 인류는 스스로 그 덫에 걸린다. 냉전시대는 끝났지만 이데올로기는 경제의 등에 업혀 여전히 음흉한 음모를 집행 중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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