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배우에서 감독으로 갈아탄 스캇 쿠퍼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몬태나’(2018)는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작이다. 흔히 웨스턴 무비라고 하지만 기존 서부 영화와는 결이 다른 로드 무비다. 미국인들이 서부를 개척하며 인디언들과의 갈등이 고조되던 19세기 말 미국 정부는 전시적인 목적으로 7년간 잡아둔 샤이엔족 추장 옐로 호크(웨스 스투디) 가족을 고향인 몬태나 주 ‘곰의 계곡’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대통령의 명령서를 받은 대대장은 퇴역을 앞둔 만년 대위 블로커(크리스천 베일)를 호출해 호송 임무를 맡긴다.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증오가 최대치인 그는 거부하지만 연금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한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불에 탄 한 외딴집을 발견하고 수색한다.

그곳엔 바로 얼마 전 폭력적인 코만치족에게 습격당해 남편과 세 자녀를 잃고 간신히 생존한 로잘리(로자먼드 파이크)가 넋을 잃고 있었다. 블로커는 그녀를 일행에 합류시킨 뒤 다시 길을 떠나다 로잘리의 원수들을 만나 복수를 해 준다. 어느 날 밤 백인 사냥꾼들이 일행 중 여자 둘을 납치해 강간하자 블로커가 추적해 사냥꾼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구출한다.

블로커는 경유지의 백인 마을에서 옛 상사로부터 죄 없는 인디언들을 죽인 뒤 붙잡혔으나 탈출한 한 탈영병을 대신 압송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인디언 사냥꾼이던 시절 보좌해 주던 부하였다. 부하는 인디언 사냥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상사가 이젠 인디언 보호자가 된 것을 비난하는데.

이 영화는 쿠퍼의 영민한 시나리오와 묵직한 무게감의 연출력, 그리고 두 주연배우의 안정감 있는 연기 솜씨가 완벽한 삼박자를 이뤄 뛰어난 완성도와 울림 큰 메시지를 선사한다. 영화를 이루는 큰 두 줄기는 ‘출애굽기’와 품사다. 블로커 일행의 목숨을 건 긴 여정은 마치 이집트에 유수됐던 모세와 이스라엘인들의 귀로를 연상케 한다.

미국인들에게 고향이 있을까? 그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유럽으로 돌아가기 힘들고, 돌아갈 이유도 없다. 이제 그들은 미국인이니까. 그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길 닿는 곳이 고향이고, 머리를 눕히는 곳이 집이다. 몬태나는 옐로 호크의 고향이지만 동시에 백인의 땅이다. 공존의 영역이라는 메아리!

인트로에서 로잘리는 두 딸에게 품사를 가르치며 “부사는 동사를 돕는 품사”라고 설명한다. 한 문장의 최소 단위는 단어 하나로도 가능하고 중요하기론 주어와 서술어가 가장 중심이 되지만 꽤 많은 품사의 단어들이 주어와 서술어를 도와 하나의 완벽한 문장이나 언어을 만든다.

이 세상이 그렇다. 백인은 원주민이 미개하다고 업신여기지만 그들만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가치를 따질 게 아니라 그 민족의 생의 권역에서의 유용성과 합리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 세상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이어져왔고, 그 어느 누구도 주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의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주의 정신이 전편에 걸쳐 흐른다.

모두 주지하듯 북아메리카 대륙은 인구밀도가 낮았다. 현재의 미국만 해도 그럴진대 19세기엔 어땠을지 짐작할 만하다. 미국인들은 불가피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일부러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인트로의 ‘미국 영혼의 본질은 억세고 고독하며 초연하고 살의에 찼다. 그건 지금까지 그대로 뭉쳐있다’라는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의 인용구가 그걸 웅변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백인과 원주민 양쪽에 증오와 복수심이라는 감정이 발생했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블로커가 인디언에게 가족을 잃었다는 건 그가 ‘늙은’ 대위로 오래 군에 복무한 것과 인디언에게 증오심 때문에 무척 강하다는 등의 설정이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로잘리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처음 블로커 일행에 합류할 때 옐로 호크 가족을 보고 경악하는 시퀀스는 그녀의 충격과 트라우마를 충분히 납득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백인은 가해자고,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일방적인 견해가 가능하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그리고 격변기의 정치적 희생양이 된 죄수들이 생존을 위해 신대륙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알 리도 없고, 이해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 누구보다 급진적인 폭력주의자였던 블로커는 긴 여정을 거치면서 깨달아 간다. 이 땅은 원래 원주민의 것이었고, 그러나 원주민 역시 자연의 소속일 뿐 소유주는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자신도 자신의 조상들도 땅을 빼앗으려 원주민을 죽였지만 죽일 게 아니라 공유하고 화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는 것을.

이는 ‘전체는 부분의 총화가 아닌 그걸 뛰어넘는 것’이라는 현대의 과학적, 심리학적, 철학적 테제인 게슈탈트 이론과도 연관된다. 품사가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주어가 아무리 잘난 체해 봐야 서술어가 없으면 제 뜻을 제대로 전달 못 하고, 서술어는 화려해지기 위해선 부사도 보조용언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완벽한 한 문장(언어)은 각 단어들의 값어치의 종합 이상의 가치를 품는다. 말 한마디로 1천 냥 빚을 갚듯.

이렇듯 이 자연 속의 모든 존재자와 존재, 현상과 형상이 조화로울 때 광대무변한 우주 속의 이 지구라는 먼지 같은 행성은 균형을 이룰 수 있으며 타 행성에 비해 지구라는 작은 행성 이상의 값어치로 게슈탈트(형태, 구성)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블로커의 오랜 전우인 상사는 “남군으로서 남북전쟁에 참전한 14살 때 첫 살인을 했다. 죽이다 보면 익숙해진다”라고 털어놓고 중위는 “그게 두렵다”라고 거든다. 상위 포식자는 낯익은 존재자를 만나면 공격적이지만 그 외에는 도망가거나 외려 호기심으로 접근한다. 인간은 육체적으론 나약하지만 정신적으로 최상위 포식자인 듯하다.

마지막에 로잘리는 블로커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천성은 착했지만 잘못된 정치에 가족을 잃고 괴물이 됐던 것. 로잘리와 옐로 호크의 손녀 리틀 베어를 기차에 태우고 돌아섰던 블로커가 기차 후미에 올라타는 엔딩 신의 의미에 대해선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장르가 다른 ‘샤이닝’의 참회, 용서, 화해, 화합의 버전!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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