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평원 교육 영상 논란(양평원 영상 화면 캡처)

[미디어파인 칼럼=김주혁 주필의 성평등 보이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성인지 교육용 영상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했는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가족부 산하 기관인 양평원이 지난해 2월 제작한 ‘잠재적 가해자의 시민적 의무’란 제목의 나윤경 원장 강의 영상이 1년 2개월여 만에 뒤늦게 관심의 초점이 된 것.

논란은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영상을 공공기관이 제작했다고 비난하는 글이 남성 회원이 다수인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달 초 게시되면서 불거졌다. 사안을 분석하기보다 단순히 비난을 전하는 수준의 관련 보도가 이어지면서 문제가 확산됐다. 급기야 ‘양평원장의 해임을 청원한다’는 청원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오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정영애 여가부 장관은 "성범죄 피해자가 여성이 많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남성·여성 프레임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면서 성인지 교육은 교육 받는 사람들에게 잘 수용될 수 있도록 내용에 있어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나 원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해당 영상은 '남성=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한다."며 "성별, 세대, 인종에 따라 누구나 가해자 위치에 설 수 있고,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달라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느끼는 여성들이 있으니 배려와 역지사지를 하자고 얘기하는 것은 ‘남성은 죄다 잠재적 가해자’라고 하는 것과 엄연히 의미가 다르다.”고도 했다. "영상의 지향점은 옳았고, 가치를 타협할 수는 없다. 다만 일상의 이야기로서는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전문가 자문을 거쳐 오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삭제하는 등 수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는 내려졌고, 양평원 젠더온 사이트에는 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더 타당할까.

▲ 양평원 교육 영상 논란(네이버 화면 캡처)

우선 영상 내용을 살펴보면 6분여짜리 이 영상은 지인에게 소개받은 교포 여성 가사도우미가 일당을 먼저 달라더라며 다른 사람을 구하려는 나 원장 어머니의 사례로 시작한다. 응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돈 떼어먹을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더라는 얘기다. 나 원장은 교포 여성이 일을 마친 뒤에 일당을 깎자거나 돈 대신 음식이나 물건을 주려는 사람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기분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분 나빠하기보다 ‘나는 믿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바로 시민적 의무라고 강조한다. 어머니가 일당보다 월급으로 미리 주고, 명절 때면 선물도 주고, 힘들면 쉬라고 하는 등의 노력을 했더니 5년째 계속 일한다고 전했다. 여성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나 원장은 이어 성폭력과 관련한 여성들의 처지를 토로한다. “여성들이 남성을 의심하면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하느냐고 화를 내고, 의심하지 않으면 스스로 성폭력을 자초해 남성을 곤경에 빠뜨리는 꽃뱀이라며 비난한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남성들을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경험들을 갖게 된다. 그 의심과 경계가 여성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남성들은 그 의심을 기분 나빠하기보다 자신은 나쁜 남성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며 노력할 수 있다. 양평원은 이런 노력을 시민적 의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여성도 을의 위치뿐 아니라 갑의 위치에 있을 수도 있고, 우리 모두가 갑이면서 을이기도 하다. 을의 입장에서 상상해 보고 합리적인 행동을 추천하는 것, 그것이 시민적 의무다. 성인지 교육은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의심해서 행하는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 스스로가 자신은 성폭력을 가하는 남성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통해 여성들과 평등하게 공존하는 방법을 배우고 시민적 의무를 기꺼이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성별에 관계 없이 피해자 또는 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좋은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잠재적 가해자의 시민적 의무’라는 제목에 나타나듯이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몇 가지 오류를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목의 ‘잠재적 가해자의’라는 용어는 이 칼럼의 제목처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받는 사람(또는 때)’이란 개념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못박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제목과 내용에서 ‘증명’할 ’의무’라는 표현도 ‘선택’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유일한 의무가 아니라 몇 가지 선택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양평원 교육 영상 논란(양평원 영상 화면 캡처)

예를 들어 한 남성이 밤에 집으로 걸어가는데 젊은 여성이 앞에 간다. 그 여성이 뒤를 돌아보며 발걸음이 빨라질 때 뒤에 가는 남성은 몇 가지 선택지 중에 고를 수 있다. 우선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상대방의 행동에 기분 나빠하면서 응징하기 위해 똑같이 빠른 걸음으로 바짝 뒤쫓아가거나 해코지를 할 수 있다. 최악의 선택이면서 사안에 따라서는 범죄행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성범죄자인지 아닌지 상대방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발걸음이 빨라질 수도 있겠다는 점을 이해하며 기분 나빠하지 않거나, 기분은 나쁘더라도 티 내지 않고 자신의 걸음걸이를 유지할 수도 있다. 또는 여성이 불안하지 않도록 “먼저 가겠습니다”라며 빠른 걸음으로 여성을 앞질러 가거나, 아예 천천히 기다렸다가 가는 선택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자신이 성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셈이다. 마지막 선택이 쌓일수록 해당 여성은 잠재적 피해 의식을 덜 갖게 되고, 우리 사회는 안전해질 것이다. 첫 번째 선택이 많아지면 불신과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가사 도우미 사례도 마찬가지다. 일당을 먼저 달라는 요구에 의무적으로 응하는 것뿐 아니라 선불을 거절하는 선택도 가능하다. 다만 전자의 사례가 많아지면 불신이 감소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의무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하기보다 여러 가지 선택 중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의무’와 ‘바람직한 선택’의 차이는 크다. 산업화 역군이나 민주화 운동가나 페미니스트나 남성이나 모두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교육할 때 큰 맥락뿐 아니라 세심한 대목까지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도 나무와 숲을 함께 보면서 큰 맥락을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오류의 정도에 어울리게 비판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요점은 잠재적 피해자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 김주혁 미디어파인 주필

[김주혁 미디어파인 주필]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양성평등․폭력예방교육 전문강사
전 서울신문 선임기자,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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