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크리미널’(아리엘 브로멘 감독, 2016)은 첩보 미스터리 영화라고 홍보되지만 첩보극으로서의 재미는 그다지 크지 않은 대신 기억 이식이란 개념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웅변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매우 강하다. 런던 주재 CIA 요원 빌리(라이언 레이놀즈)가 스페인 테러리스트 헤임달의 부하에게 살해된다.

‘더치맨’이라 불리는 해커가 미국 국방부를 해킹해 미사일 통제권을 장악한 뒤 미 대사관에 되팔려 했고, 빌리는 가방에 현금과 여권을 넣은 채 더치맨을 만나려다 살해됐는데 가방의 행방이 묘연하다. 더치맨은 원래 헤임달에게 팔려고 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돈만 받으면 미국에 돌려주려 했던 것.

그게 실패하자 이번엔 러시아와 접촉해 자신이 미국 미사일을 통제한다는 걸 증명한 뒤 망명을 위한 접선을 약속한다. 런던 CIA 지국장 퀘이커(게리 올드먼)는 프랭크스(토미 리 존스) 박사에게 도움을 청해 죽은 빌리의 기억을 산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을 하기로 하고, 박사는 제리코(케빈 코스트너)를 적임자로 지목한다.

제리코는 자신을 스카우트하려는 갱단조차 몰살시킬 정도로 강하고, 통제가 불가능하며, 선천적으로 도덕성이 백지인 악당 중의 악당이다. 수술 후 제리코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자 퀘이커는 부하들에게 살해를 명령하지만 제리코는 요원들을 해치고 탈출한 뒤 빌리의 기억대로 그의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침입한다.

빌리의 아내 질리언(갤 가돗)은 기겁을 하며 딸 엠마를 보호하려 하는데 웬일인지 제리코는 빌리의 기억의 지배를 받아 그냥 귀중품만 빼앗아 나간다. 보석상에 간 제리코는 귀중품 중 엠마의 골동품 빗만은 도로 집어넣는다. CIA와 헤임달의 추적을 동시에 받는 제리코는 부상을 입고 다시 빌리의 집에 들어와 상처를 치료한다.

엠마와 외출 후 돌아와 제리코를 발견한 질리언은 권총을 겨누지만 제리코는 “나도 빌리처럼 당신에게 손을 댈 수 없다"라며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인다. 제리코는 엠마에게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이고, 엠마 역시 금세 그와 친숙해진다. 마음이 누그러진 질리언은 제리코가 그날 밤 집에서 자도록 배려해 준다.

다음날 숨겨진 가방의 단서를 찾은 제리코가 집을 나가자마자 헤임달의 부하들이 들이닥쳐 질리언과 엠마를 유괴하는데. 빌리는 초반에만 잠깐 나올 뿐 실질적인 주인공은 극악무도한 중범죄자였던 제리코이다. 그와 더치맨을 잡거나 죽이기 위해 CIA와 테러 조직이 경쟁을 벌이고 여기에 KGB까지 가세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특이하고 볼 만한 이유는 일반적인 첩보 영화의 선과 악의 단순한 구조에서 벗어났다는 데 있다. 초기에만 해도 제리코는 그저 큰돈이 든 가방을 찾아 저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서는 빌리의 기억이 만든 새로운 인격이 지배를 확장하기 시작해 다른 점점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간다.

그걸 보여 주는 시작은 엠마의 빗만 안 팔고 후에 돌려주는 연결이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방문 때 엠마를 위해 와플을 만들어 주고,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며 놀아 준다. 아침에 일어난 그는 자신의 기억 수술 때문에 생긴 머리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베개에 묻은 걸 미안해하고, 질리언은 “괜찮다”라며 그에게 마음을 열었음을 직유한다.

질리언이 “누구세요?”라고 묻자 “나도 몰라요. 숫자로만 불렸으니까”라고 제리코는 답한다. 그는 사회에 있는 시간보다 감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당신의 남편이 머리에 들어오니 많은 게 느껴져요. 옳고 그름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질리언은 “그게 사랑한다는 신호”라며 완전히 마음을 개방한다.

제리코는 “나도 사랑의 뜻은 알지만”이라고 말끝을 흐리는데 사랑의 의미는 살다 보니 대충 깨우치긴 했지만 실제로 느껴보진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건 곧 이젠 느낌으로 알겠고, 느끼게 됐다는 뜻이다. “이제 어디로 가요?”라는 질리언의 질문에 그는 “빌리가 이끄는 대로”라고 답한다.

이는 이제 제리코에서 거의 빌리로 변전했다는 뜻이다. 후에 박사는 “당신을 평범하게 만들 방법을 찾았다”라며 빌리의 기억을 지워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제리코는 거절한다. 그건 도덕심과 양심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매우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의 천성이 변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 데카르트부터 자크 데리다 등 이원론 철학자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 이래 파르메니데스, 플로티누스, 스피노자, 헤겔 등의 일원론자 역시 다수이다. 유일신을 모시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영화는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라이프니츠 등의 철학자가 가진 다원론 사상과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던 유전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닮았다.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의 두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양면성을 가진 이도 있고, 선하다가 악해지거나 악하다가 선해지는 사람도 있다고 외친다.

맹자와 순자를 간단하게 비웃고, 일원론과 이원론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린다. 마치 대표적인 범신론 종교인 힌두교처럼, 다수의 민족들이 갖고 있는 토테미즘처럼. 어쩌면 감독은 현대 사회의 교화 시스템에 대해 일종의 교훈을 던지는 듯하다. 제리코에게 이식된 빌리의 기억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접근의 은유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인물은 바로 엠마고 조력자는 질리언이다. 과연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을까? 이 역시 다원론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지만 포기하지는 말자는 게 감독의 호소이다. 많은 이들이 주지하듯 현재의 교화 시스템은 일반인은 물론 재소자들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유명 배우들의 명연기와 이런 메시지가 매우 값진, 볼 만한 영화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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