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구 위 600킬로미터 떨어진 우주. 섭씨 125도에서 영하 100도를 오르내리는, 생명체는 살 수 없는 곳.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스톤(산드라 블록) 박사와 지휘관 코왈스키(조지 클루니) 등이 파견된다. 실수로 미사일이 러시아 위성을 맞추는 바람에 그 파편들이 시속 3만 2000킬로미터로 날아 그들의 우주선을 파괴한다.

다른 대원들은 모두 사망하고 둘만 남게 되자 그들은 생존해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우주 정거장을 향해 필사적인 이동을 한다. 거기서 소유즈를 타고 지구로 귀환한다는 작전. 하지만 제트 팩의 연로가 다 떨어진 상황에서 낙하산 줄에 두 사람이 간신히 매달리게 된다. 이대로라면 곧 두 사람 다 우주 공간에 떠다니다 산소 부족으로 죽을 운명.

코왈스키는 자신을 놓아 달라고 애원한다. 부디 그녀만이라도 생존해 귀환하라는 것. 스톤이 말을 안 듣자 코왈스키는 먼저 자신이 손을 놓는다. 스톤은 천신만고 끝에 우주 정거장에 도착한 뒤 중국 우주 정거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소유즈의 전원 스위치를 켜지만 작동하지 않는데.

‘인터스텔라’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고 등장인물도 단 두 명이지만 심오한 내용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 영화가 가진 철학은 간단명료하다. 일원론과 운명론이다. ‘인터스텔라’에서 딸 머피는 아빠 쿠퍼에게 자신의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냐고 항의한다. 이에 쿠퍼는 ‘머피의 법칙’은 나쁜 뜻이 아니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준다.

운명론이다. 지구로부터 러시아 위성 잔해가 날아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코왈스키가 스톤에게 작업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녀는 조금만 하면 완성한다고 지체했던 행동에 대해 사과한다. 그러자 코왈스키는 어차피 충돌하게 되어 있었다며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해 준다. 운명론이다.

다음은 일원론. 스톤의 이름은 라이언. 코왈스키가 “왜 이름이 그렇냐?”라고 묻자 그녀는 “아버지가 아들을 원하셨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 허블 복구 임무에 투입됐을 만큼 웬만한 남자 부럽지 않은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아들이나 딸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코왈스키는 마디그라 축제를 거론한다.

마디그라 축제는 세계 최대의 동성애자 축제이다. 굳이 남과 여로 구분하려는 이원론 혹은 이분법에 대한 반발이다. 스톤의 꿈속에 나타난 코왈스키는 “착륙은 발사랑 똑같다.”라며 진퇴양난에 빠진 그녀에게 해결책을 알려 준다. 그러자 그녀는 “죽거나 살거나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라며 용기를 북돋운다.

우주 공간에 고립되기 전까지 그녀는 나약한 한 여자에 불과했다. 전에 그녀는 딸 하나를 키우는 미혼모였다. 하지만 딸은 어린 나이에 사고로 죽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출근하고, 퇴근하며, 라디오를 틀어 놓고 운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떤 직업을 가졌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듯 관성적으로, 습관적으로 살아간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내가 내일 무얼 해야 하는지,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개척적으로, 개혁적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모른 채. 그렇게 우리네 인생이 무미건조하다는 이 살벌한 지적. 스톤은 지구에서의 훈련 때 각종 시뮬레이션에서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왜? 그때까지만 해도 자포자기의 패배주의가 그녀의 의식을 지배했으니까.

코왈스키가 스스로 우주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간신히 우주 정거장 안에 들어온 스톤은 무거운 우주복을 훌훌 벗어 버린 뒤 몸을 웅크리는데 바로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양태이다. 코왈스키의 희생을 통해 새로 거듭난다는 의미이다. 코왈스키는 자신을 보내 달라고 애원할 때 “보내 줄줄도 알아야지”라고 충고했다. 역시 운명론이다.

스톤이 우주 공간에서 유영할 때 끝없이 자전한다. 마치 지구처럼. 제목의 뜻은 중력이다. 무중력 상태인 우주 공간 혹은 우주선 안에서 사람은 자유를 느낄 수 있다. 마음대로 둥둥 떠다닐 수 있으니. 하지만 그 반대로 그들은 의지대로 이동할 수 없다. 제 몸인데도 제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다.

대신 중력의 지배를 받는 지구에서는 조금만 높은 데에 올라가도 공포를 느낀다. 공간에 내던져질 경우 중력에 의해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떨어져 죽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감독의 질문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반드시 떨어지는 게 나쁘고, 오르는 게 좋은 건가?’라고.

지구에서의 삶이 죽음과도 같았던 스톤은 우주로 도피했다. 그리고 우주의 풍광은 매우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무중력 공간은 산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우주복이 없으면 불타 죽거나 얼어 죽는 곳이다. 소리도 전달이 안 된다. 대화가 단절된 죽음의 공간. 코왈스키와 스톤이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음악을 들려주며 지구와 교신하는 이유는 인간관계 속 소통의 소중함을 의미한다.

스톤은 홀로 뇌까린다. “우리는 죽어 간다. 난 오늘 죽는다. 죽는 걸 안다.”라고.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우주. 그 안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이니 인간의 한 개체는 단세포 하나보다 더 작은 존재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전 분야에 걸쳐 엄청난 문화적, 과학적 진보를 이루었고, 여전히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다.

중국 우주 정거장의 이름이 텐공이다. 끝없이 열린 하늘. 사람이란 종이, 인생이란 명제가 꽤나 대단한 것 같고, 실제 그렇기도 하지만 종당에는 이 억겁의 우주의 생명에 비해 짧디짧은 미미한 찰나의 순간으로 끝을 맺기 마련이다. 중력은 지구의 중심을 향해 끌어당기는 힘이다.

인생이란 죽음을 향해 달린다. 죽음은 인생의 중력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순간을 즐기자.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경우 열패감이 시위하기 마련이다. 희망과 현실의 괴리감을 깨달을 때 초조함이 가두 판매대를 휩쓸 수밖에 없다. 그런 모든 고통에 경쾌한 조소를 날린 뒤 통쾌한 자기애로 오늘을 살자는 얘기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춤을 추며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에 빠져 살 것을 언명한 니체처럼.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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