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테스와 보낸 여름’(스티븐 바우터루드 감독, 2020)은 국내에서 접하기 흔하지 않은 네덜란드 영화인데 매우 선겁고도 슬거운 감동을 선사한다. 10살 샘은 부모, 13살 형 요러와 함께 섬으로 여름휴가를 왔다. 세 남자는 백사장에서 공을 차는데 그만 샘이 파놓은 구덩이에 요러가 빠져 다리를 다친다.

샘은 병원에서 혼자 밖으로 나와 생선 튀김을 사 먹은 뒤 동네를 구경하다 테스라는 한 살 연상의 소녀를 만나 함께 살사를 배우며 친해진다. 샘은 막내이기에 나중에 홀로 남겨질 것을 고려해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는 ‘4차원’ 소년인데 테스는 그보다 더한 듯하다. 그녀는 아버지가 화산 폭발 때 죽었다고 한다.

그녀의 엄마는 조금 전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 이다. 갑자기 울린 휴대전화를 받은 테스는 살짝 긴장한다. 손님이 온 것. 서둘러 함께 모녀가 운영하는 별장으로 간다. 손님은 연인 휘호와 엘리서. 그런데 테스는 엘리서와는 흔쾌히 악수를 하지만 휘호의 손은 외면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혼자 있겠다며 행행히 떠난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테스는 샘에게 피크닉을 가자더니 별장으로 가서 휘호 커플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거절당해 둘만 소풍을 간다. 샘은 아무 생각 없이 테스가 가져온 포도 주스를 마시는데 아뿔싸, 그건 와인. 샘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둘은 그렇게 서먹서먹한 채로 헤어진다.

다음날 아버지는 전 가족이 볼링장에 가자고 제안하지만 샘은 테스를 만나야 한다고 핑계를 댄다. 아버지는 테스도 데려가자고 하지만 샘은 테스가 볼링을 싫어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홀로 남겨진 샘은 매일 가는 백사장으로 나가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한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 외딴집을 구경하다 주인인 노인 힐러와 마주치자 혼비백산해 도망간다.

숙소에 돌아오니 테스가 요러와 매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테스는 샘에게 휘호 커플과 퀴즈 게임 놀이를 하러 가자고 달래지만 샘은 테스가 나이 많은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해 화를 내며 거절한다. 그러자 진지하게 표정이 바뀐 테스는 휘호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고백하는데.

일단 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 자체가 휴가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고즈넉한 섬마을이라는 배경은 보는 내내 평안한 안식과 휴식을 제공한다. 그러면서 감독은 ‘과연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진중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를.

이다는 철없던 시절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갔다 휘호를 만나 순간의 사랑으로 테스를 낳았다. 휘호는 테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이다는 테스가 휘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테스는 어느 날 우연히 엄마의 여행 수첩에서 아빠의 이름을 발견하고 SNS를 뒤져 찾아낸다.

그리고 별장 무료 숙박 이벤트에 당첨됐다고 이메일을 보낸다. 평소 이다는 ‘아빠는 필요 없다’라고 말했지만 테스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휘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면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것이고, 나쁜 사람이면 끝까지 숨길 요량이었다. 그게 다였다.

마을 거리 축제에서 휘호를 만난 테스는 자신이 딸임을 고백하려 한다. 그런데 옆 테이블의 아주 어린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부모는 물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자 휘호는 “난 애가 없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한다. 그 말에 갑자기 비참해진 테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어간다.

뒤쫓아 그녀를 잡은 샘이 “네가 못 하면 나라도 알려 줄 것.”이라고 외치지만 테스는 분노에 가까운 표정으로 반대한다. 아버지는 휴가 마지막 날을 온 가족이 함께 보내자고 명령하지만 샘은 메모 한 장 남긴 채 개펄로 나가 외로움 적응 훈련인지, 아니면 상념에 젖은 건지 모를 방황을 한다.

그러다 밀물 때 공교롭게도 펄에 발이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때마침 나타난 힐러에게 구조된다. 막내라 제일 늦게 죽을 줄 알았는데 제일 먼저 죽음을 경험한 것. 힐러의 집에서 부부의 사진을 본 샘은 “할머니는?”이라고 묻고 힐러는 “죽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게 우리들 삶.”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힐러는 “혼자 남겨지는 게 힘든가요?”라는 샘의 질문에 “아내가 매일 보고 싶지만 좋은 추억이 많기에 이겨 낼 수 있지. 인생은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아. 세상엔 돈을 모으는 사람이 있지만 추억을 모으는 사람도 있지. 살아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추억을 남겨라.”라고 말한다. 그 추억을 공유할 파트너는 가족이다. 이 영화의 주제.

샘과 테스가 ‘4차원’인 건 그들이 나이에 비해 일찍 인생철학을 깨우치진 못했어도 최소한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공룡은 자기가 마지막인 줄 알았을까? 죽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라는 샘의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나중에 다 죽고 혼자 남겨지면 기분이 어떨까?“라는 문제에 천착한다.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라는 운명이 주어져 있다’라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짙게 흐르는데 그 선택은 힐러를 통해 추억이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아등바등 몸부림쳐 봐야 크게 변할 건 없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좋은 사람들과 최대한 많은 추억을 만들라는 공리주의, 이타주의적 실존주의가 넘실대는 멋진 작품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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