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김종재(33) 감독의 장편 데뷔작 ‘생각의 여름’은 독립 영화에서 상업 영화로 가는 진로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는 꽤 영민한 작품이다. 주제는 진지하지만 가벼운 웃음을 주는 시퀀스들로 잘 포장되었기에 지루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상큼함이 두드러진다. 문예창작학과 출신 29살의 현실(김예은)은 시인 지망생이다.

첫사랑 원창을 ‘절친’ 주영(한해인)에게 빼앗긴 뒤 그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최근엔 연인 민구(곽민규)가 떠나갔다. 시인 공모전에 출품할 시 5편을 써야 하는데 4편만 완성했을 뿐 5편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 몇 줄 쓴 걸 ‘알바’를 하는 카페의 후배 ‘알바생’ 유정(신기환)에게 보여 줬더니 칭찬을 한다.

그게 마음에 찰 리 만무. 기분 전환을 할 겸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산에 올랐다가 주영을 만나게 된다. 주영은 현실보다 먼저 등단에 성공했다. 어색한 시간을 보낸 뒤 하산한 현실은 대학 동기인 ‘남사친’ 남희(오규철)를 불러내 실컷 술을 마신다. 그래도 별다른 변화의 기미는 보일 줄 모른다.

결국 그녀는 민구를 한 번 만나야만 막힌 시상이 풀릴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를 불러낸다. “왜, 나를 떠나갔느냐?”라고 묻지만 대답은 없다. 대신 향후 우연히 만날지라도 아는 체하지 말자는 얘기만 들려올 뿐. 과연 마지막 시는 완성할 수 있을까? 등단에 성공은 할 수 있는 걸까?

감독은 동갑내기 시인 황인찬의 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실제 그의 시 5편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 이 시대 청춘들의 현주소를 절망적이거나 비관적으로 그리지 않아서 아름답다. 그렇다고 허황된 희망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의 이름처럼 현실을 현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주력한다.

대학을 졸업한 20-30 세대에게 현실은 매우 냉정하다.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라던 구세대의 낙관주의는 비현실적인 인식론으로 각인된 지 오래. ‘먹고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한 이 시대. 이제 청춘들에게 케케묵은 선대의 인생 공식 따위는 깨진 지 오래이다.

‘대학 졸업-취업-연애-결혼-출산’ 등의 정형화된 인생의 항로는 더 이상 없다. 그건 청춘들이 스스로 진로를 수정해서가 아니고, 기성세대가 ‘빈익빈 부익부’ 형상을 극대화한 결과이다. 따라서 개천에선 절대 용이 나올 수 없다.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이고,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이다. 기적이란 없다.

현실이 석성산에 오른 것으로 보아 그녀의 주거지는 경기도 용인시. 대학 역시 그 도시 소재일 것이다. 수도권 유명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 대신 시인의 길을 선택했다. 문예창작학과 출신이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꿈과 현실은 엄발날 확률이 높기 마련. 게다가 정적에게 뒤졌다니! 등단이 어렵다는 것보다 그게 현실이라는 게 더 무섭다.

그녀가 느끼는 ‘생각’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이다. 사랑했던 연인마저 자신을 쓰레기 버리듯 내던지고 떠난 지금 머리에 떠오를 생각이 별로 없을 것이다. 여름은 사계절 중 가장 찬란하다. 그래서 젊음의 계절이다. 노인들은 더위에 축 처지지만 젊은이들은 태양의 정기를 받아 더욱더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런데 현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그다음에 기댔던 연인에게 버림받았다. 내일모레이면 서른 살인데 아직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데다 유일한 목표인 등단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과연 내일은 나아질 수 있을까?

여름은 젊은이들이 몸으로 움직여 땀을 흘려야 마땅한 계절인데 그녀는 그저 생각 중일 따름이다. 생각은 많고, 시는 산으로 가기에 땀이라도 흘릴 요량으로 산에 올랐더니 주영을 만났다. 재수없는 사람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

민구는 왜 현실을 떠났을까? 그는 인형 뽑기 놀이를 즐겼고, 또 그걸 잘했다. 현실은 집에서 민구가 뽑았을 가능성이 없는 거북 인형을 발견하고 그에게 돌려주지만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거절한다. 그러자 현실은 그 앞에서 인형을 내동댕이친다. “쓰레기는 이렇게 버리는 것.”이라며.

민구는 현실에게서 ‘현실’을 봤을 것이다. 현재까지 루저인 두 사람이 함께 있어 보았자 제자리걸음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물론 현실이 잘되길 바라고 떠났다기보다는 자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질문에 즉답을 회피하는 것이다.

영화는 재기 발랄한 유머와 판타지적 요소를 적당하게 버무려 소소한 재미를 주는 한편 시와의 협업을 통해 품격을 격상시킨다. 시는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매우 짧고 간결하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 안에는 소설 못지않은 서사와 에세이와 견줄 만한 철학이 담기기 마련이다.

즉 시는 자유와 격식 파괴, 그리고 장고보다는 그리 길지 않은 호흡을 의미한다. 도식적인 틀을 거부하는 파격의 자유분방한 문장 구성, 그리고 아름답거나 의미심장한 단어의 채택 혹은 창조로 신선한 충격을 준다. 지금까지 현실의 시가 꽉 막혀 있던 건 그녀의 삶이 지루하고 지난한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을 ‘시인의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횔덜린은 반평생을 정신 착란에 시달리는 가운데 모순과 대립이 사라진, 자연과 조화된 고대 그리스 시대를 추구했다. 시인의 기능성은 그런 존재자이기에 가능하다고, 혼란의 이 시대에 시적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폭염에도 나는 벌벌 떨었다’라는 대사와 한여름에 패딩을 입은 아이러니 시퀀스를 극복해 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자화상과 미래상은 매우 맛깔스럽게 다가온다.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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