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더 기버: 기억전달자’(필립 노이스 감독, 2014)는 로이스 로리의 1993년 소설 ‘더 기버’를 원작으로 한 SF 영화이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때문에 전쟁을 겪은 먼 미래. 새로 형성된 커뮤니티라는 지도층은 다름을 제거한 상태인 늘 같음 상태라는 개념을 지향하는 사회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커뮤니티의 책임자는 수석 원로(메릴 스트립). 이 사회는 온갖 수단과 검열을 사용해 분란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렸다. 날씨는 늘 생산에 좋은 상태로 조절되며, 생활 영역은 완벽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커뮤니티는 구성원들의 뇌에서 색깔이라는 개념도, 예술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졸업식에서 커뮤니티는 청소년들에게 각자의 직업을 부여해 준다. 조너스(브렌튼 스웨이츠)에게는 딱 한 명만 선별되는 기억 보유자의 지위가 주어진다. 기억 보유자는 선대 보유자로부터 조상들의 모든 기억을 전달받아 조직의 현자 역할을 해 내게 된다. 조너스는 전달자(제프 브리지스)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는 전달자로부터 눈이 쌓인 산속에서 썰매를 타거나, 코끼리를 구경하는,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색다른 기억을 전수받는 한편 잔인한 전쟁 같은 인류의 괴로운 역사적 기억도 전달받게 된다. 특히 그는 전달자가 들려주는 음악 소리에 매료되어 생각과 감정의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자신의 앞에 로즈메리(테일러 스위프트)라는 소녀가 보유자로 선택되었던 사실도 알게 된다. 그녀는 바로 전달자의 딸. 그러나 로즈메리는 커뮤니티의 획일적인 명령을 거부했기에 결국 제거되었다. 전달자는 그런 상처를 가졌기에 모든 사람들이 커뮤니티의 획일주의에서 벗어나길 바랐던 것이다.

조너스는 어느 날 커뮤니티에 의해 집안에 막내로 입양된 갓난아이 가브리엘 역시 제거될 운명인 것을 알고 그를 구해 커뮤니티의 세계를 탈출하는데. 이른바 ‘건푸’ 액션을 개발해 낸 영화 ‘이퀄리브리엄’(커트 위머 감독, 2002)의 통제된 미래의 디스토피아 내용과 매우 유사한, 볼 만한 작품이다.

‘이퀄리브리엄’은 전 국민에게 매일 약을 먹게 하고, ‘더 기버’는 매일 주사를 맞게 한다. 두 가지 모두 구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예술을 부정하고 말살하려 한다는 점 역시 비슷하다. 임신과 출산마저 통제하고 억제한다는 것까지도. ‘더 기버’의 차별화 전략은 색깔이다.

조너스가 생각과 감정의 자유로움, 그리고 자신의 진로의 선택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기 전까지 화면은 흑백이다. 이후에는 컬러. 커뮤니티가 지배하는 사회는 모든 게 천편일률적이다. 평화롭지만 단조롭고, 편하지만 환희가 없으며, 불안은 없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품을 수도 없다.

그런 무미건조한 삶이 과연 인간적인 삶일까? 그저 인간이 주는 사료와 물로 연명하며 쳇바퀴를 돌아 그에 보답하는 하루하루를 사는 다람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이 사회의 사람들은 사과를 입에 달고 산다. 그 사과를 들으면 받아들인다는 피드백도 필수적이다. 감정이 없고 오직 형식이 지배하는 사회.

이 영화는 한마디로 각종 이념에 대한 반항아이다. 과연 사상이란 인간의 정서와 감성에 필요한 것인지 냉정하게 되묻는다. 커뮤니티가 지배하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이자 플라톤이 구상한 공산주의 사회이다. 플라톤은 아이가 태어나면 우성인 아이만 선택해 키우고 열성인 아이는 버리자고 했다.

또한 선택된 아이는 부모에게서 분리해 공동으로 육성하자고 했다. 그 아이들은 능력대로 신분을 나누자고 했다. 당연히 친부모는 친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냥 모든 어른이 모든 아이의 부모였다. 플라톤은 심지어 부부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배경과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현대인은 현실과 이론의 차이를 잘 안다. 진보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실패를 보고서 그에 대해 더욱 절감하고 있다. 플라톤이 마르크스에 비해 선지자였던 점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의 공산주의의 이론은 기원전 그리스의 각 도시 국가에서나 적용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현대의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그의 ‘영혼 불멸’은 종교의 축재에는 크게 기여했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의 추구에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이 영화는 그런 플라톤의 오류를 꼬집는데 한편으로는 한때 까까머리와 교복과 제복이 범람했던 우리나라의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연상케 하기도.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는 ‘고생했던 기억도 지나고 나면 유쾌한 추억’이라고 말했다. 심리학에는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므두셀라 증후군과 나쁜 것만 기억나는 순교자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있다. 그만큼 사람에게는 기억을 조종하거나 추억에 의해 현실을 살아가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가 강하다.

칸트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즐겨 썼다. 영국의 경험론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물론 모든 동물이 경험을 통해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혹은 동물들은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인 판단을 내리곤 한다. 진화론적으로는 후성규칙이다.

즉 선대의 조상부터 가깝게는 부모로부터 그들이 겪은 경험을 DNA를 통해 물려받았기에 경험을 못 했을지언정 유전으로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다. 뱀이 독 개구리를 먹어 보지 않더라도 치명적인 독이 있음을 이미 알고 피하는 것처럼.

이처럼 직접 겪어서 얻은 추억이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간접 경험의 기억이든 우리는 그 과거의 사건과 역사를 통해 현재를 사는 지혜를 얻고, 그래서 미래를 희망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에서 예술은 필수이다. 왜? 동물이 아닌 사람이기에.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조차도 “청년기에는 기억이 가장 강렬하고 가장 오래 남기 때문에 기억에 특별세를 부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어린이에게서 기억을 제거하고 청소년에게 꿈을 허락하지 않는 이 작품 속 세계는 팽배한 자본주의가 젊은이에게 꿈을 포기하게 만든 이 시대와 유사하지 않은가?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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