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5차(마지막 회차) 답사인 ‘남소문동천 물길 따라 걷는 남산 동쪽 길’을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지난 8월 21일 오전 8시 30분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 1번 출구 앞에서 청계천을 이루는 서울의 주요 ‘물길답사’ 마지막 시간이 시작됐다. 이번 물길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란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했다.

이번 답사 역시 무더위를 감안해 답사 시간을 대폭 앞당겼다. 그러나 날씨가 변수였다. 강한 비가 내릴 것이란 예보가 있었지만 강행했다. 결과론적으로 답사 내내 비가 따라다녔고 후반부에 강력한 ‘물폭탄급’ 비를 만나 완전히 젖었다. 그래도 20여 명에 달하는 답사팀은 끝날 때까지 거의 이탈하지 않고 마무리를 함께 했다. 서울 물길에 대한 호기심의 반증이다. 또한 5회에 걸친 물길답사에 대한 멋진 마무리였다.

버티고개역 인근에서 비를 간신히 피할 수 있는 처마 밑에서 답사는 시작됐다. 해설을 맡은 한이수 역사문화해설사가 남소문동천의 유래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조선 시대 남소문이란 성문이 있었다. 1457년 세조 3년에 만든 문이다. 당시 한강진에서 도성을 들어오려면 광희문을 통해야 했다. 길을 돌아야 하고 거리가 멀다는 불편함 때문에 새롭게 문을 하나 낸 것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지형 상으로는 장충동에서 한남동을 넘어가는 고개 근처로 추정된다.

남소문은 설치된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에 폐지됐다. 당시 실록에 따르면 ‘좌참찬 임원준·행사맹 안효례 등을 불러서 남소문을 막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임원준 등이 아뢰기를, 음양의 설(說)에 의하면 이 문은 정오방(正午方)이므로, 성상의 생년에 금기가 된다 하여 폐지를 건의했다.

임원준은 5일 후 임금에게 “도읍을 정하던 당초에 어찌 경영(經營) 할 때에 잘 헤아리지 않고서 이 문을 설치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이 문을 설치하였으나, 찻길이 통하지 않아서 큰 이익이 없고, 또 음양가가 손방(巽方, 팔방의 하나. 정동과 정남 사이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한 45도 각도 안의 방향)을 매우 꺼리므로 처음에 이 문을 설치할 때에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과연 뒤에 의경세자(세조의 장남)께서 훙서하셨으니, 음양가의 설은 비록 믿을 것이 못되나, 이 문은 막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또 한 번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국립극장 일원서 발원 동대문 인근서 청계천에 합수

▲ 남소문동천 물길. 국립극장 일원서 발원해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통해 청계천에 합류한다.

명종과 숙종 때 남소문을 다시 열자는 상소와 신하들 의견이 있었지만 반대 여론이 커서 끝내 개통하지 못하다가 기록도 없이 없어졌다. 남소문동천은 지금의 국립극장 일대에서 발원한 물길이 광희사거리 인근에서 나뉘어 한 줄기(지류)는 종로5가 부근서 청계천에 합수된 후 오간수문으로 빠져나가고 다른 한 줄기(본류)는 이간수문으로 흘러 나갔다. 오간수문은 기념물 형태로, 이간수문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뒤편에 거의 완벽하게 복원돼 있다.

국립극장서 동국대학까지는 복개돼 보이지 않던 물길이 남산2호터널 입구와 장충리틀야구장을 지나면 제법 많은 물을 품고 흐른다. 중학천, 대학천과는 달리 자연하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물론 물은 용수를 끌어서 쓰고 있지만 물길 자체는 자연스럽단 의미다. 물길 위로는 청계천서 옮겨 온 수표교가 있다. 물길은 수표교를 지나 다시 암거 돼 사라진다. 이간수문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축 시 발견돼 원형에 가깝게 복원돼 있어서 물길의 흔적을 현대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청계천 지류는 거의 모든 구간이 복개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복개된 물길 위와 주변에는 이르면 고려 시대, 그리고 조선 시대와 근현대에 형성된 역사문화자원, 공간·자연유산, 산업관광 유산 등이 무수히 들어서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이들 자원을 ‘점·선·면’으로 이어 공간을 이해하는 시간이다. 아울러 2만 보에 달하는 긴 답사 끝에 맛집을 찾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 물길이 시작되는 국립극장에서 문화지평 답사팀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문화지평은 청계천을 이루는 서울의 주요 5대 물길 답사와 함께 3D, 동영상, 텍스트 등 다양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진행한다. 답사 대상은 남소문동천을 비롯해 삼청동천, 흥덕동천, 창동천, 흥덕동천 등 청계천을 이루는 5개 지류 발원지부터 청계천 합수 지점까지다. 이번 답사는 주요 5개 지류 중 마지막 코스인 남소문동천 물길이다.

답사해설을 맡은 한 해설사는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우리문화숨결에서 경운궁(덕수궁) 궁궐길라잡이,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해설사, 서울문학기행 해설사로 참여하고 있다. 공저로는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 등이 있는 서울역사 전문가다.

남소문동천 물길에 유독 다리가 없어

모든 청계천의 지류들에 크고 작은 다리가 있었지만 유독 남소문동천에는 없다. 이유가 기록된 것은 없지만 유추하건대 성의 외곽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이을 땅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소문동천은 남산의 동쪽 계곡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광희문 앞을 지나 이간수문을 통해 성 밖으로 흘러간다.

도성 안의 모든 물줄기가 청계천과 합류한 후 동대문 옆 오간수문을 통과해 중랑천으로 흘러드는데 반해 유일하게 오간수문 옆 이간수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나가 도성 밖의 청계천 본류와 합류하는 물줄기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00년에 발간한 ‘서울의 하천’에 따르면 남소문동천에 놓인 다리는 없다.

남소문동천 주변의 역사적 공간

▲ 남소문동천 물길 옆으로는 많은 시층이 쌓여 있다. 사진은 구 타워호텔과 리모델링한 반얀트리호텔, 자유총연맹이 입주해 있는 자유센터, 국립극장.(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답사팀은 버티고개에서 반얀트리호텔을 오르기 위해 한양도성 길 일부를 지났다. 한 해설사는 한양의 도성과 각자성석에 대해 설명했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약수동, 신당동 일대 풍경이 장대비 속에 고즈넉하게 보였다. 원래는 이 길은 야행을 하려고 계획했지만 동영상 카메라 조명 문제로 포기하고 주간으로 돌린 것이다. 비가 많이 와서 야간 촬영이나 우중 촬영이나 어려움은 매 한 가지였다.

반얀트리서울호텔과 자유센터를 지나 국립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얀트리는 과거 타워호텔이란 이름을 가진 자유센터 부속 숙박동이었다. 자유센터는 1962년에 열린 아시아반공연맹 임시총회의 회의장이었고 타워호텔이 숙박시설이었던 것이다. 자유센터 입구에는 커다란 철제 사각 맨홀이 놓여 있다. 맨홀 밑으로 큰 물줄기가 흐른다는 증거다. 이 물줄기는 국립극장서 발원한 물줄기와 만나 남소문동천을 이룬다. 국립극장이 발원지가 되는 이유는 청계천 합수지점까지 물줄기가 가장 길기 때문이다.

남소문동천이 발원한 곳에는 현재 국립극장이 위치해 있다. 국립극장은 1973년 신축된 공연예술 전용공간이다. 이전에는 명동에 있는 명동예술극장을 국립극장으로 사용했다. 정부는 1950년 4월에 국립극장을 창설했다. 처음엔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을 국립극장으로 사용하다가 1952년 전쟁이 나자 대구 문화극장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1957년 명동으로 온 것이다. 명동국립극장 이전에는 시공관이라 했고 일제강점기 때는 메이지좌(明治座)로 불렀다.

국립극장 신축은 1966년 발표된 종합민족문화센터건립계획의 일부로 시작됐다. 국립극장의 장충동 이전 계획은 국립극장을 비롯해 국립국악원, 예총회관, 국립중앙도서관 등을 건립하는 매머드급 종합민족문화센터 조성 계획에 따른 것이다. 1967년 4월 장충공원에서 종합민족문화센터 기공식이 열렸다. 그러나 종합민족문화센터 계획은 대폭 축소돼 국립극장만 건립하는 것으로 목표가 수정됐다. 1973년 장충동 착공한 지 6년 만에 국립극장이 완공되고 1973년 8월 남산으로 이전, 10월 17일에 개관식을 치렀다. 장충동 국립극장 시대는 이른바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과 더불어 시작됐다.

국립극장 설계공모에서 이희태 건축가의 안이 채택됐다. 이희태는 혜화동 성당, 국립경주박물관, 성라자로마을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경기공립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후 1945년까지 조선주택영단(현재의 주택공사) 건축과에 근무했다. 광복 후 도시계획연구회 상무이사 등을 역임했고 건축설계사무소를 개설해 활동했다.

이희태는 국립극장을 설계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국립극장과 문화센터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 무렵 준공된 일본의 국립극장과 미국의 링컨센터에 주목했다. 파리의 오페라극장 같은 네오 클래식 건물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뉴욕 주립극장과 에이버리 피셔 홀을 장충동 국립극장 설계에 참고했다.

한마디로 신축 국립극장은 서양의 극장들을 표본으로 삼고 외형은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인 모양으로 한 것이다. 기둥과 보가 주요 디자인 요소였다. 외관은 누마루를 돌리고 그 위에 열주를 세웠다. 또 처마를 올리는 등 한국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식 건축양식을 조화시키려고 했다는 평을 받는다. 외부 마감은 대리석으로 설계했으나 예산 문제로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건설은 삼환기업이 맡았고 공사 기간은 정확히 6년이 소요됐다. 총공사비는 9억5000만원이 들었다.

답사팀은 국립극장에서 발걸음을 옮겨 남산2호 터널 앞과 장충리틀야구장을 지나 동국대 입구에 다다랐다. 동국대 입구에도 거대하고 육중한 철제 사각 맨홀이 있다. 이곳은 아예 맨홀 위에 아스팔트를 입혀서 도로처럼 보이게 했다. 맨홀 규모가 엄청난 양의 물을 흘려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 장충단공원에 세워져 있는 ‘장충단’ 비와 비석 앞에서 공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한이수 해설사.

한 해설사는 이준 열사 동상을 지나 장충단공원 장충단비 앞에 답사팀을 멈춰 세웠다. 장충단비는 1900년(광무 4년)에 세워진 비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을 비롯해 갑신정변, 임오군란 때 희생된 영령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장충단은 이렇듯 오롯이 우리의 호국영령을 위한 현충시설이었다.

을미사변 때인 1895년(고종 32년)에는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 등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됐다. 고종은 이곳에 사전(祠殿)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세워 장충단을 꾸몄다. 대한제국 시절 봄, 가을 두 차례 지내던 제사를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된 뒤 1908년 중단됐다.

일제는 1910년 장충단을 폐사하고 비석도 뽑아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조선총독부는 1919년부터 벚꽃을 잔뜩 심고 1920년대 후반에는 아예 공원화했다. 뽑힌 장충단비는 1945년 해방과 함께 현 신라호텔 자리에 세워졌고 1969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일제는 장충단 옆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 박문사를 지었다. 이때 경복궁 석재와 목재를 뜯어 왔고 경희궁 정문 흥화문도 떼 왔다. 심지어 상하이 사변 때 죽은 일본군 육탄 3용사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 정신교육 전진 기지로 삼았다. 우리 현충시설을 완전히 파괴하고 일제 현충시설로 만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국립극장서 동국대학까지는 복개돼 보이지 않던 남소문동천 물길은 남산2호터널 입구와 장충리틀야구장을 지나면 제법 많은 물을 품고 흐른다. 중학천, 대학천과는 달리 자연하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물론 물은 용수를 끌어서 쓰고 있지만 물길 자체는 자연스럽단 의미다. 물길 위로는 청계천서 옮겨 온 수표교가 있다. 물길은 수표교를 지나 다시 암거 돼 사라진다.

▲ 남소문동천 구간은 발밑으로 물길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가 많은 곳이다. 자유총연맹 입구, 동국대입구, 경동교회 옆 SK주유소 등지에 육중한 사각 철제 맨홀이 그 증거다. 또한 자연하천 형태로 잘 보존된 장충단 수표교 구간.

장충단공원에 접해 있는 동대입구역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면 장충동족발골목이 나온다. 지하철3호선 동대입구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족회관’을 필두로 ‘장충족발집’, ‘평남할매집’. ‘원조1호 장충동할머니집’, ‘뚱뚱이할머니족발집’ 등이 나란히 서서 손님을 반긴다.

1970년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역은 족발의 대명사처럼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지금은 많이 축소됐지만 과거에는 장충체육관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방향으로 300m 정도에 걸쳐 족발음식점들이 몰려 있었다. 대부분 40년 이상 업력을 가진 족발 노포들이다. 관할 중구청은 2000년에 특화거리로 지정했다. 서울시는 2013년 골목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시초는 평안북도 실향민 출신 전승숙, 김정연 할머니가 1957년 ‘평안도집’이란 상호로 동업을 하면서부터다. 원래 된장으로 조리하던 평안도식의 족발을 메주를 담기 여의치 않자 간장 양념 족발을 개발하면서 서민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6년 뒤 각각 ‘뚱뚱이할머니집’. ‘평남할매집’으로 분리하면서 족발골목의 태동을 알렸다. 이들 족발집은 올해로 창업 64년을 맞는다.

족발이 식재료로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돼지고기를 일본에 수출하고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때가 1970년대로 족발집의 입지도 성공에 한몫했다. 서울 시민이 많이 찾던 남산공원, 장충체육관, 장충단공원 등이 주변에 있어서 유동인구가 많은 요지였던 것이다. 단백질이 부족했던 시절, 족발이 저렴한 보양식으로 소문이 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옛 영화가 조금은 시들었지만 여전히 족발 마니아들과 추억의 맛을 잊지 못하는 백발성성한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다.

족발골목을 지나서 조금 걸으면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가 나온다. 경동교회 직전 SK주유소 한쪽에도 거대한 사각 맨홀이 발밑으로 큰 물이 지나가는 길임을 증명하고 있다. 경동교회를 설계한 김수근은 교회가 ‘예배의 장- 만남의 장- 축제의 장’으로서 의미를 살리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나타내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외벽은 반쪽으로 쪼갠 투박한 붉은 파벽돌을 사용해 인간의 절박함, 고민, 순수함들 나타내려 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도시 속의 거대한 성 같은 형상을 보여준다.

1981년에 건립된 경동교회 본당은 건물 곳곳에 신학적 상징과 이미지가 충만하게 스며들어 있다. 교회 측에서는 김수근의 미학적 독창성을 높이 샀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손을 형상화한 메인 타워, 부활을 향한 골고다 언덕길을 표현한 본당 진입로, 초기 로마교회 카타콤의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예배당 내부, 제단 위 17m 높이의 천장에서 십자가로 내리비치는 빛 등의 상징과 미학이 있는 건축물이다.

경동교회를 지나온 답사팀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뒤편 이간수문에 다다랐다. 남소문동천 물길의 끝이다. 이간수문을 나간 물은 청계천에 합수돼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한 해설사는 “남소문동천의 한 줄기는 훈련원공원을 가로질러 청계천으로 흘러가고 남은 한 줄기는 지금 여러분 앞의 이간수문으로 나간다”고 말했다.

답사길 내내 비가 많이 내렸다. 수표교 아래로 흐르는 물의 양이 제법 됐다. 5회 차에 걸친 청계천을 이루는 주요 5대 물길에 대한 답사도 마무리됐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딛고 선 발밑으로 여전히 유유히 흐르는 서울의 물길이 있다는 사실에 답사 내내 모두가 놀란 시간이었다. 귀한 시간을 허락해준 서울시에 감사를 표하고 함께 했던 해설사와 서울시민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이간수문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단체사진. 비가 많이 내렸지만 서울의 물길을 알고자 하는 답사팀의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출발한 인원 대부분이 남아 마지막까지 해설사의 설명에 집중했다. 서울 물길답사는 이것으로 5회 차를 완료했다.

남소문동천 물길 답사코스
버티고개역 1번 출구(남소문 터)-반얀트리호텔-자유센터-국립극장(발원지)-신라호텔-장충단공원-남소영터-경동교회-광희문-이간수문 -청계천 합수

■ 일시 : 2021. 8. 21(토) 8:30~12:00
■ 주관 : 문화지평
■ 후원 : 서울시청
■ 해설 : 한이수 역사문화해설사

<참고문헌>
-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지천연구(2020)
- 서울역사편찬원, 쉽게 읽는 서울史 현대편2(2021)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2000)
- 김효중, 한국 개신교 교회건축 문화 연구, 성균관대 일반대학원 박사논문(2007)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동서남북 서울미래유산 만보답사(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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