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삼국지(연의)’라고 하면 흔히 유비, 관우, 장비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심지어 중국 일부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해 제의를 지낼 정도이다. 그런데 ‘삼국지: 용의 부활’(리옌쿵-이인항-감독, 2008)은 기존의 삼국지를 다룬 콘텐츠와 다르게 조자룡과 더불어 그의 그늘에 가린 나평안, 그리고 조영에 초점을 맞춘다.

상산 출신의 평안(홍진바오, 홍금보)은 출세의 꿈을 안고 촉나라 유비의 군대에 들어가 작은 벼슬을 얻는다. 그의 밑으로 같은 상산 출신의 자룡(류더화, 유덕화)이 입대한 뒤 그를 친형처럼 따른다. 유비는 위나라의 조조와 천하를 놓고 전쟁 중인데 여러 면에서 열세에 놓여 있다.

1만 명의 조조 군대와 대치 중인 1000명의 상산군 진영에 제갈량이 나타나 필승의 전략을 세워 줌으로써 승전한다. 그 과정에서 평안은 적장에게 밀려 죽을 뻔했지만 자룡의 도움으로 살아나지만 철저하게 숨긴 채 자신의 공로만 부각시킨다. 이에 힘입어 그는 유비의 두 처와 아들의 호위대장에 임명된다.

그는 자신이 공을 세우려고 자룡에게 다른 임무를 맡긴 뒤 호위를 하다가 그만 적군에 쫓겨 유비의 가족이 낙오되게 만든다. 그 죄를 물어 관우와 장비가 평안을 사형시키자고 압박하자 자룡이 이를 막은 뒤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유비의 아들을 구할 뿐만 아니라 조조를 조소한다.

이 공로로 자룡은 영웅이 되고 이후 혁혁한 전과로 관우, 장비, 마초, 황충 등과 함께 오호장군에 임명되어 백전불패의 신화를 만든다. 그러나 전쟁은 32년에 걸쳐 진행된다. 그동안 유비가 죽어 아들 선이 황제에 등극하고, 자룡을 제외한 나머지 오호장군들이 전사해 아들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조조 역시 사망하고 손녀 영(매기 큐)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직접 자룡을 잡겠다고 이를 간다. 드디어 양국은 최후의 운명을 가를 전투를 전개하려 한다. 승상이 된 량은 관우의 아들 흥과 장비의 아들 포를 앞세워 출군 시키려 하자 자룡은 자신의 마지막 전쟁이라며 평안과 함께 출군한다.

그러나 웬일인지 적군은 자룡의 동선을 알고 있다. 게다가 량은 영이 자룡을 고립시키도록 만든 뒤 관흥과 장포를 적군의 주력 부대를 치는 병법을 장치해 놓았는데. 자룡은 자신의 군대가 놀라움 속에 배신감을 느끼며 당황하는 사이 영의 도전을 받고 부상을 입게 되는데.

한국 제목과 영어 제목은 비슷하다. 다만 중국어 제목은 ‘삼국지, 갑옷을 벗은 용을 보다.’ 정도로 해석된다. 실제로 자룡은 영과의 결투에서 허리에 화살을 맞지만 갑옷을 벗고 치료받기를 거부한다. 지금까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갑옷을 벗어 본 적이 없다며. 그럴 경우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에.

즉 용은 자룡이다. 이 영화는 크게 운명론과 실존주의, 그리고 추억을 얘기하고자 한다. 자룡은 “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다.”라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결국 출발했던 봉명산으로 되돌아와 고립되어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그는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에 왔다.”라고 자조한다.

그러자 그들이 내린 결론은 “운명은 결국 하늘이 정한다.”였다. 라이프니츠의 ‘세상만사는 모두 애초부터 신이 조화롭게 정한 것일 따름’이라는 예정조화를 연상케 한다. 사람을 살게 하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추억일 것이다. 노쇠한 자룡이 출전을 고집하자 량은 “우리 나이에는 추억에 의지해 여생을 보낸다.”라며 만류한다.

자룡은 “수십 년간 전장에 있다 보니 추억도 잃었습니다.”라고 응수한다. 하지만 량의 말이 맞았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자룡은 평안에게 “형님,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뭘 위해 싸운 걸까요?”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전장에서 잃은 추억, 전장에서 찾았다고 승상에게 전해 주세요.”라고 유언을 남긴다.

자룡과 평안은 실존주의로 대립한다. 평안은 “한 번뿐인 인생, 큰 꿈과 야망을 품어야 한다.”라며 강한 출세론을 설파하고, 승승장구하는 자룡은 자신의 이름이 세세연년 남을 것에 뿌듯해한다. 실존주의란 ‘인간이라는 존재와 현실에서의 그 의미를 그 구체적인 모습에서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사상운동’이다.

그래서 야스퍼스 등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인간에게서 중요한 것은 이성이나 인간성 같은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다.’라고 주장한다. 또 ‘인간의 경우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주장했다. 실존은 인간의 ‘현실존재’(진실존재)를 뜻한다. 본질도 존재이긴 하지만 가능적 존재, 추상적 존재일 뿐이다.

평안은 평생을 출세를 위해 달려왔고, 자룡은 일찍 출세를 한 채 평생 그 출세의 갑옷을 벗기 위해 싸워 왔다. 그러나 지도 한 바퀴를 돈 끝에 그들은 결국 제자리로 회귀했고, 죽음을 맞는다. 세상은 아직 태평성대가 안 되었고, 결국 천하는 위, 촉, 오가 아닌 진나라가 거머쥐게 된다. 두 사람의 본질(야망)이 어떻든 현실(실존)은 운명적이었다.

그래서 자룡과 평안은 결국 키에르케고르로 결론을 맺는다.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이기에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인식,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현실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고, 실존은 각자의 결단에 의해 선택할 수밖에 없다’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명언을 두 사람은 따른다. 아니, 그런 운명이었다.

평안은 자룡에게 “뭘 위해 싸웠냐고 물었지? 난 날 위해 싸웠어.”라고 말한다. 자룡은 “승패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패배 없인 승리도 없기 때문이지.”라며 마지막으로 말에 오른다. 히어로물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지의 신념에 대한 질문이다. 마지막의 오블리크 앵글 숏은 그걸 의미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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