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바그다드 카페’(퍼시 애들런 감독, 1987)는 지난 4월 국내에서 세 번째 개봉되었을 정도로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걸작이다. 독일 로젠하임 출신의 야스민은 미국 여행 중 남편과 헤어지고 남편이 버린 커피포트와 여행 가방을 들고 라스베이거스 끝 황량한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 들어선다.

그곳 주인은 카페, 주유소, 그리고 모텔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허름한 숙소를 운영하는 브렌다. 무능한 남편은 며칠 전 싸운 뒤 집을 나갔다. 사춘기 아들 살은 벌써 딸을 낳았지만 온종일 피아노만 연주하려 하고, 딸 필리스는 남자들과 어울리려고만 할 뿐 브렌다를 돕지도, 공부에 열중하지도 않는다.

카후엔가가 근무하는 카페에는 숙소에서 장기 투숙하며 문신을 새겨 주는 일을 하는 데비, 카페 앞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는 가짜 미술가 콕스가 죽치고 앉아 있다. 그렇게 야스민은 이 숙소에 흘러 들어오게 된다. 생활에 찌들어 만사가 귀찮아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인 브렌다는 야스민을 경계한다.

자상한 야스민은 브렌다의 사무실과 건물 등을 청소하는가 하면 필리스와 살의 친구가 되어 준다. 그러자 브렌다는 노골적으로 야스민을 공격하며 떠나라고 소리친다. 그러다가 야스민의 “자식이 없다.”라는 말에 태도가 돌변한다. 그렇게 친해진 야스민은 카페에서 마술 공연을 펼치며 일을 돕는다.

그 공연이 트럭 운전사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져 카페는 연일 손님들로 북적이고, 브렌다는 야스민과의 즐거운 공연에 새로운 삶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소문을 들은 보안관이 나타나 취업 비자 없는 외국인의 상업적 행위는 불법일 뿐만 아니라 관광 비자가 만료되었다며 야스민을 추방하는데.

사막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그림임에도 정말 비주얼은 아름답다. 페미니즘의 냄새가 살짝 풍기면서도 결국 삶은 살아지고, 삶은 살아야만 한다며 행복과 보람의 기준을 제시하는 행복론과 인생론의 영화라는 점에서 정말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브렌다는 눈물을 흘리며, 야스민은 땀을 흘리며 첫 대면을 한다.

브렌다는 삶이 고단하고 운명이 가혹하다며 참담한 심정이었고, 야스민은 지금까지 힘든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는 의미이다. 그런 두 여자가 서로를 도와주고, 이해해 주며 새로운,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간다는 설정은 분명 페미니즘을 웅변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바그다드 카페 사람들이 그렇다.

카후엔가는 미국인이 진출하기 전 그 땅의 주인이었던 원주민의 후예이지만 지금은 흑인인 브렌다에게 복종하는 피고용인일 따름이다. 콕스는 할리우드 출신이라며 예술가인 양 행세하지만 미술부 영화 스태프 출신이다. 데비는 품격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천박한 직업 출신의 뉘앙스를 풍긴다.

한 청년이 찾아와 브렌다에게 근처에서 캠핑을 해도 되냐고 묻는다. 허락을 받고 그곳에서 묵는 그는 부메랑을 던지는 게 전부이다. 부메랑은 돌고 돌아 결국 시작점으로 오는 우리네 ‘물레방아 인생’을 말한다. 황량한 사막은 ‘죽은 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생명체는 살아간다. 단지 사람만이 방향을 못 찾고 헤매거나 탈진해 결국 그곳에 갇힌 채 생을 마감할 따름.

이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막과 다름없는, 아찔하고 두려운 공간이다. 모래 밑의 수많은 동물들이 저마다의 생존의 방식을 갖고 살아가듯 사람 역시 그걸 찾아야 한다. 그건 사랑이고, 우정이다. 화합하고,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기 브렌다와 야스민처럼 경계하기 마련이다.

우정을 강조한 철학자들은 정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플라톤도 그랬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이 특히 오늘날의 이 각박한 세상에서 정말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가 본 우정은 효용성(실리)를 추구하는 우정, 즐거움을 추구하는 우정, 그리고 선을 추구하는 우정의 세 가지였다.

첫째는 우리가 사회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으려 하는 소위 인맥이다. 겉으로는 서로 잘 맞는다며 ‘영원히 함께하자.’라는 식으로 우정 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실리 추구의 목적이다. 둘째는 그보다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쾌락이 목적이기에 오래갈 수 없는 가벼운 관계에 머물다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브렌다는 야스민에 의해 카페가 성업을 이뤘지만 거기에서 만족을 찾은 게 아니라 삶이 풍요롭고 즐거워진 데 대해 고마워했다. 둘이 즐거워한 것은 서로 술친구였다거나, 쇼핑 등의 취미가 같아서가 아니었다. 심지어 야스민은 음악적 조예가 깊어 살의 피아노 솜씨를 인정했지만 브렌다는 피아노 소리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그들이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라는 선의 추구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다. 카페 손님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고, 동질감을 공유할 수 있었기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마술과 예술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이다. 마술은 분명히 속임수이지만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진짜 기적이냐, 눈속임이냐에 있는 게 아니라 마술이 얼마나 신선하고, 신기하며,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느냐에 있다.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게 있다. 혹은 우리가 기적이라고 여기지만 신의 조화일 수도, 신뢰와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다. 배경이 무엇이건 기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야스민에게 마술은 원래는 그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한 도구였지만 이젠 소통의 통로가 되었다. 콕스는 야스민의 많은 초상화를 그린다. 그 작품이 예술성이 있든, 없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야스민이 캔버스 앞에 앉아 있음으로써 예술적 만족을 느낀다는 데 있다. 그래서 콕스와 야스민은 살의 음악성을 알아준다. 그건 인간이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데이비드 흄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그래야 기적과 마술과 예술로써 행복해질 수 있기에.

사족; 독일 백인과 미국 흑인의 우정이라는 설정은 눈여겨볼 만하다. 뵈르뎅 조약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형제에서 원수로 바뀌었다. 양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미국이라는 복병의 변수로 인해 결국 패전했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과거의 은원을 풀고 화해하고, 우정을 나누자는 멋진 메시지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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