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를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문화지평은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유산을 둘러보는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사업을 수행했다. 이번 사업은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건축기획과의 후원으로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란 주제로 진행했다. 6회 차 답사는 강남땅에 보란 듯 우뚝 서 있는 김수근의 법원종합청사, 산 밑에 숨은 듯한 김중업의 구 한국교육개발원 등을 찾아 답사했다. 답사는 9월11일 오전 9시 전상봉 해설사 해설로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옥상에서 시작했다.

강남 인구분산의 시발점 고속버스터미널

▲ 80년대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을 위해 지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초기 모습과 현재 모습.

이번 답사에서는 김중업, 김수근의 건축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에 다른 건축물들을 함께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강남고속버스터미널(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다.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 인구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 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적인 방안이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서울시장 구자춘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원래는 서울을 3개 핵심공간으로 나눠 개발하는 계획에 따라 버스터미널도 영등포와 강남, 반포 등 3곳을 개발하려고 했지만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강남으로 집중된다.

1975년 6월 27일 서울시는 도심 집중의 완화와 강남 개발을 촉진한다는 이유로 서초구 반포동 19번지에 종합버스터미널을 건설 계획 발표했다. 5만평의 부지에 고속버스터미널(3만평)과 시외버스터미널(1만평)을 짓고, 나머지 1만평의 부지에 택시 승강장과 시내버스 주차장 등을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1975년 11월 초기에는 가건물 형태로 운영되다가 하차장은 1980년 9월 19일, 본관은 1981년 10월 11일에 완공해 같은 달 20일 개장했다. 그러나 교통난이 심각해지자 서울시는 시외버스터미널을 남쪽, 지금의 남부터미널로 이전한다.

완공 당시에는 3층과 5층에도 승차장이 있는 초대형 버스터미널로 서울의 명물로 꼽혔으나 승차장과 진입로를 교량이 아닌 일반 콘크리트 건물 기준으로 지었기 때문에 승차장이 버스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1988년 5층 승차장, 1992년 10월에는 3층 승차장을 폐쇄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금은 수많은 유동인구와 편리한 교통 요지로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민현식(완종합건축설계사무소)이 설계를 맡았다.

1970년대부터 서울과 지방을 잇는 버스 여객 및 화물을 수송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국내 최대, 서울의 대표적인 버스터미널이다.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종합터미널이자 ‘민족 대이동’이라 표현되는 귀성·귀경길의 중심지로 서울시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장소란 의미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완전한 평형 건축이 추구하는 평등 ‘서울법원종합청사’

▲ 서울법원종합청사는 김수근이 신축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당선된 작품이다. 터파기부터 건축 과정과 건축 초기 청사 앞은 여전히 무허가 판자촌이 즐비한 모습.

공간연구소 김수근이 설계한 서울법원종합청사는 신축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무려 28 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선된 작품이다. 가작으로는 건축문화설계연구소의 박수량·김충섭·김영섭, 금성건축연구소의 한종언, 종합환경연구소 일건의 황일언이 차지했다. 심사위원으로는 서울대 이광노, 한양대 김진일·유희준, 홍익대 강건희, 연세대 송종석 교수 등이 참여했다. 공교롭게도 김중업합동건축연구소 김중업 대표도 심사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김중업과 김수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건물은 공모 당시 고등법원과 민사지방법원, 형사지방법원, 가정법원 등 4개의 법원으로 구성돼 있다. 공모 요강은 ‘설계자의 창의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법원 기능에 맞는 합리적인 구조와 재래식 구조를 탈피한 새로운 형상을 부각하고 조형미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한다’고 명시했다. 아울러 외관은 법원의 권위를 상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수근은 “이 법원들의 법정은 저층부에 4개의 법정동으로 분산됐으며 사무실 부분은 두 개의 타워로 올라 있다. 강한 중심축을 갖는 평면은 중앙홀을 중심으로 엄격한 균제형식을 취하며 대단히 복잡한 출입등선을 기능별로 구분한다. 거대한 매스를 둘로 나누고 이들 사이에 공조기능을 수행하는 4개의 원통을 두어 이를 통합하여 조형에서도 완전한 평형이 이루어지도록 했다”고 설계 의도를 밝혔다. 이곳은 사전 연락 없이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김중업 귀국 첫 작품 구 한국교육개발원

▲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소재의 한국교육개발원. 교육에 관한 연구와 교육방송 등을 위해 1972년 설립된 정부출연 연구기관. 설립 당시 내‧외관 모습과 이번 답사 때 정문 앞에서 담은 모습.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빈 건축물로 남아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은 1972년 8월에 ‘정부출연연구기관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만들어진 국책연구기관이다. 한국의 전통과 현실에 알맞은 새로운 한국적 교육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교육의 목적·내용·방법 등에 관한 종합적이며 과학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또 한국 교육이 당면한 제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혁신적인 교육체제를 개발함으로써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는 데 있다. 연혁을 간략히 살펴보면 1972년 8월 설립된 이래 1974년 8월에 라디오학교방송을 시작했다. 1975년 8월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방송시설을 갖췄다. 이때 건축 설계를 김중업합동천축연구소의 김중업이 맡았다.

대진 52,066㎡, 건축면적 1,450㎡, 연면적 4,691㎡, 지상 5층 건물로 알루미늄 커튼 휠(16㎜복층유리) 및 타일로 마감을 했다. 김중업은 설계소묘에서 “79년에 영구 귀국한다. 알뜰한 작품을 고국에 남기고 싶고, 뜻있는 젊은이들에게 건축가의 참모습을 보이고 싶은 까닭이다. 명예나 재산도 탐낼 나이는 넘었고 오로지 성심, 성의껏 좋은 작품을 수놓고 싶어서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귀국 첫 작품으로 이 작품을 바쳤다. 태양열과 풍력을 시험하고 싶고, 연구기관다운 풍부함을 담고 싶고, 고속도로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반짝 빛내고 싶어서이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고 이곳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즐거움을 드려 한국교육방송에 획기적인 기원을 긋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고 덧붙였다.

짧은 내용이지만 김중업의 다양한 감정이 들어 있다. 이 부지에는 김중업이 설계한 한국교육개발원 신관을 비롯해 스튜디어동(棟), 연구동, 수위실로 이뤄져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은 충북 진천군 덕산읍 교학로로 이전했다.

▲ 구 한국교육개발원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아직도 현판이 달려 있다. 현판 글씨는 교육자이면서 의사인 서예가 김사달 선생이 쓴 것이다.

<참고문헌>

-법원행정처(1991), 서울 법원종합청사 건립지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2013),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축도시연구정보센터,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건축문화지상전, 월간건축문화사(19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교육개발원, 신세호(1995)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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