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 감 풍부한 대학건물과 소품 발굴한 마지막 여정 [문화지평 답사 아카이브]

문화지평l승인2022.01.09l수정2022.01.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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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를 총 10회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건축기획과의 후원으로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란 주제로 진행했다. 10회 차 마지막 답사는 매스 감이 큰 대학 건축물과 상대적으로 조그만 소품들을 발굴하는 답사를 했다.

겨울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구랍 4일 서강대 본관 앞. 코로나19도 맹위를 떨쳐 온 나라가 다시 강화된 방역지침 속에 놓이면서 어디든 출입이 부자유스럽게 됐다. 처음 코로나19가 준동했을 때는 대학도 대문을 꽁꽁 잠그고 일반인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러나 코로나19에 대한 피로도가 강해지고 더불어 백신 2차 접종까지 이뤄진 상황이라서 다행히 출입을 막진 않았다. 그래도 인원이 제법 모이고 ‘남의 집 안방’이라 조심스레 답사를 시작했다.

김중업은 1957년에 경주국립공원계획, 인천 해무청 청사 등에 이어 1957년 서강대학교 본관을 맡았다. 당시 동승동 서울대 관사에서 몇몇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했던 작품이다. 여전히 르 꼬르비지에의 영향 아래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시기의 작품이다. 하루빨리 온전히 자신만의 걸음걸이와 힘으로 걷고 싶었던 처절함이 엿보이는 시기다. 그래서인지 구석구석 두서가 조금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한 작품이다.

건축문화활성화사업 10회 차 마지막 답사

▲ 구랍 4일 서강대 본관 앞에서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마지막 답사를 시작하는 모습.

서강대 본관은 올 건축문화 현장 답사에서 접한 김중업 작품 중 매스 감이 있는 마지막 건축물이다. 김중업은 이미 1956년 부산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현 언어교육원) 등 대학건물에 대한 기술이 어느 정도 축적해 나가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르 꼬르뷔지에가 숨어 있지 않고 두드러질 때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강대 본관은 르 꼬르뷔지에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으로부터의 독립과 김중업 건축의 완성인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이후 주한프랑스대사관, 유유산업 공장 등에서 보여준 한국전통과의 접목은 김중업이 홀로서기에 성공했단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게감 있는 작품들이다.

김중업과 우리 근대건축의 역사는 맞물려 있다. 마지막 회에서 다시 한번 중첩된 역사를 되짚어 본다. 우리나라의 근대건축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개항 이후 서양의 근대건축물이 외국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속속 들어섰다. 지어졌다. 우리나라 근대건축은 1897년 대한제국 이후 활기를 띤다. 하지만 대한제국 내에는 서양 건축에 대한 전문가가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 외국인 건축가나 종교인 등에 의해 세워졌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일본에 의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건축 분야도 일본 손아귀로 넘어갔다. 이후 대한제국과 일본에 있는 건축학교에 조선인들의 입학이 허용되지만 극히 소수였다. 또 고급 건축기술에 대한 접근도 차별이 심했다. 광복 후에도 우리나라 건축 전문 인력과 건축기술이 부족한 이유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복구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현대건축 1세대인 김중업은 한국전쟁 이후 황폐해진 우리 건축에 유럽적 건축적 언어를 갖고 한국의 건축적 특징을 잘 접목한 건축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프랑스 르 꼬르뷔지에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프랑스 현대 건축문화와 르 꼬르뷔지에의 5가지 요소인 필로티, 자유로운 입면, 열린 평면, 띠 형태의 유리창, 옥상정원을 수용해 한국적 요소와 결합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서강대 본관은 김중업 건축세계 1기 작품

▲ 현대건축 1세대 김중업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직후 초기 작품인 서강대 본관의 옛 모습. 지금과 크게 변화는 없다.

김중업의 활동은 시간적으로 크게 3기로 분류된다. 프랑스 르 꼬르뷔비지에 사무실에서 돌아온 1956년부터 1971년 프랑스로 강제 출국당하기 전까지를 1기, 망명 기간을 2기, 1979년 영구 귀국해 타계하는 1988년까지 등 3기로 구분을 한다. 1기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르 꼬르뷔지에의 형태주의적 건축의 영향으로 서구의 모더니즘적 건축을 기초로 하는 근대건축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1939년 요코하마 관립보통학교에 입학과 함께 건축과 만나게 된다. 그의 시작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서구 건축에 대한 흡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52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여를 했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르 꼬르뷔지에의 사무실에서 1952년부터 1955년까지 3년여 동안 근무한다. 이 시기에 많은 건축적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는 르 꼬르뷔지에의 후기 건축관을 이어받았다.

그는 이런 조형적 건축언어를 한국 전통과 결합시킨 건축적 형태로 적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르 꼬르뷔지에의 후기 작품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이와 같은 모습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많이 희석되면서 김중업만의 건축세계를 보여주게 된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2기인 1971∼1979년은 그의 건축시기 중 가장 암흑기이다. 광주대단지 사건과 와우아파트 붕괴 등에 대한 그의 직설적인 비판은 박정희 정권의 미움을 샀고 결국 프랑스로 강제 출국당한다. 한 건축가가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체류하면서 대학에서의 수업과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건축적으로는 빛을 보지는 못했다. 1973년 외환은행 본점 현상설계 공모에 도전했으나 무위로 그쳤고 결국 이는 정림건축에서 가져갔다.

1970년 아프리카의 니제르 도자기 공장과 1978년 나이지리아 나고스 시의 에분 올루와 스포츠 호텔 등 해외 건축에 관여했을 뿐이다. 그는 1978년 영구귀국한다. 이후 타계한 1988년까지 조형적 요소들을 구상하고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이런 시기적 측면을 놓고 서강대 본관 건축을 바라보면 비전문가라도 조형미가 어느 정도 해석된다.

서강대 본관은 다양한 형태의 조합이다. 서향 배치로 교문에서 진입 시 노고산 자락 언덕에 정면이 부각된다. 3층의 수평적 매스는 남측의 5층 수직적 매스와 대비된다. 정면인 서측 입면은 RC조 태양광 차단장치, 현관의 캐노피, 옥상의 처마 형태가 인상적이다. 남측 입면은 수평적 발코니, 북측 입면은 곡면 화장실로 구성되는 등 다양한 형태미를 자랑한다. 옥상정원과 현관 연못을 조성했다. 연못이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연못은 스테인드글라스 벽 밑을 통해 내외부가 서로 통하도록 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보고 싶은 연못이다.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해질녘 석양을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늦은 오후의 햇살은 낮고 깊게 파고든다. 이를 막기 위해 건축가는 건물 외부에 판형의 차양판을 댔다. 그 차양판의 각도는 날카로운 석양의 그림자가 건물 면에 회화적인 요소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때문에 일조 상태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부한 표정 변화를 보여 준다. 시차를 두고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연출하는 건물은 건축을 넘어 예술 작품에 가까워진다. 빛과 그림자라는 생명의 근원을 건축에 불어넣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홍익대 문헌관‧인문사회관 A‧B‧C동도 김중업 작품

▲ 홍익대 문헌관‧인문사회관 A‧B‧C동도 김중업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큰 특징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조롭다. 홍익대 VR지도에서 푸른색 사각형 부분이 김중업 작품 건물군이다. 홍익대에서는 내부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날 해설을 맡은 김태휘 해설사는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조경과 건축을 전공한 전문가다. 그래서인지 김중업의 작품세계를 누구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다. 김 해설사의 코스 안내에 따라 경의선 폐철도 부지 선형(線型) 공원을 따라 홍익대로 이동했다. 이 학교에도 김중업의 작품이 여럿 있다. 학교 본관인 문헌관과 인문사회관 A‧B‧C동이 김중업의 작품이다.

홍익대는 1946년 홍문대학관(弘文大學館)이란 이름으로 용산구에서 문을 열었다. 초기에 대종교 인사들이 재단에 참여하면서 교명을 홍익대학으로 변경했다. 이어서 1948년 재단법인 홍익학원 및 홍익대학관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은 뒤 교사를 용산구 문배동으로 이전했다. 한국전쟁 후 1955년에 마포구 상수동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1961년에 대학정비령에 의해 미술학부를 제외한 모든 학부가 폐지됐다. 홍익미술대학으로 격하되었는데 오늘날 홍익대하면 미대를 연상시키는 장점으로도 남는다. 1971년 수도공과대학을 합병해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현재는 특정 종교와는 관계없다.

김중업 설계 은행건물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

▲ 이날 청춘마루를 지나쳤으면 오롯이 김중업을 위한 답사가 됐을 뻔했지만 김태휘 해설사가 용케도 김수근의 설계 작품을 찾아내 답사객을 놀라고 즐겁게 했다. 옛 은행건물과 비교하면 기둥은 온전하게 남았다.

홍익대를 나와 무심코 어울마당로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데 김 해설사가 대각선 노란색 건물을 가리키며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했다. 외벽에는 ‘청춘마루’라는 이름은 달고 있는 건물로 원래는 KB국민은행 영업점이었다. 지난 1976년 서교동 지점으로 문을 열었고 2016년 서교동종합금융센터로 전환하면서 지난 40년간 이 지역 KB국민은행의 금융 영업을 책임지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당시 공간건축사무소는 국민은행 건물 여러 곳을 설계했다고 한다. 그에게 의뢰된 대부분의 국민은행 지점 건물은 열주(일렬로 세워진 기둥) 방식과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설계됐다. 2016년 11월 국민은행은 은행 지점을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스마트뱅킹으로 인해 지점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나온 고민 중 하나였다.

청춘마루는 가까운 홍익대 건축대학과 디자인 MOU를 맺었다. 디자인에는 이영수, 이현호, 장용순, 이경선, 김수란 등 홍익대 교수들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김수근 건축가의 손길이 묻어있는 '서교동점' 외관을 살리기로 의견을 모으고 건물 뼈대는 그대로 남겨두고 내부를 뜯어고쳐 복합문화시설을 만들었다.

청춘마루의 상징적 공간은 '노랑계단'이다. 이 계단에서는 코로나 시국 전엔 명사들의 강연이 진행되기도 했고 청년들을 응원하는 행사가 기획됐다. 유명 미술가의 작품이 전시되는가 하면 커스텀 신발 등과 같은 상업적인 전시도 시도됐다.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이 공간이 청춘의 열기로 꽉 채워질 날이 곧 오기를 열망하며 발길은 주택가 골목으로 돌렸다.

주택가에 범상치 않은 디자인 ‘라이너노트’

▲ 김중업은 개인 주택도 많이 남겼다. 현재 라이너노트란 음악서점이 들어서 있는 서교동 주택.

김 해설사가 이끌고 간 곳은 주택을 개조해 만든 ‘라이너노트’란 이름의 공간이다. 문패만 봤을 때는 도저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라이너노트는 ‘음반에 딸린 해설지’라는 뜻이다. 알고 봤더니 이곳은 음반 제작배급사 '페이지터너'가 운영하는 음악을 주제로 하는 서점이다.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책을 소개하고 있다.

전형적인 70년대 지어진 부잣집 2층 콘크리트와 벽돌조를 혼합한 주택으로 처마와 옥상을 오르는 원형계단에서 김중업 건축 특성이 잘 살아 있다. 김중업에게 있어서 집 또한 그가 애정을 쏟은 대상 중 하나였다. 집은 예술이어야 하며 건축가는 '삶의 공간'을 설계하는 예술가라는 것이 김중업 지론이었기 때문에 공을 많이 들였다.

라이너노트는 2층 서재를 음악 관련 서적과 재즈 음반 등을 판매하는 음악전문 독립서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거실 바닥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한쪽 벽은 책과 음반이 꽂혀 있고 다른 한쪽엔 오디오 시스템이 있다. 건물 외벽에도 ‘JAZZ’라고 붙여 놨듯이 이곳에선 재즈 음악을 틀어준다. 고풍스러운 소파와 피아노가 있는 거실, 온실 공간에서 읽을 수 있다. 거실에선 매주 작은 라이브 재즈 공연이나 기타 교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임대인은 이 집을 임대하기 위해 집주인 할머니의 면접을 5번이나 봤다는 일화가 있다.

카페 뜯어내고 다시 개인주택으로 변모

▲ 에스프레소 하우스란 카페가 들어 있던 연희동 주택은 80년대 김중업이 제자이자 후배 건축가 장석웅을 위해 지어준 주택이다.

에스프레소 하우스란 카페가 임대해 썼던 연희동 사러가쇼핑 옆 붉은 벽돌 주택은 김수근이 아닌 김중업의 3기인 80년대 작품이다. 제자이자 건축가로서는 후배인 장석웅의 부탁을 받고 지은 것이다. 장석웅과의 건국대 인연이 둘 사이 막역한 관계를 대변한다.

현 건국대 언어교육원은 상허기념도서관이 준공되기 전까지 원래 중앙도서관으로 사용됐다. 김중업은 도서관을 설계한 것이다. 건국대 설립자 상허 유석창 선생은 “그때 중앙도서관에 쏟은 정열은 무척이나 큰 것이었네. 설계는 프랑스 유학 다녀온 사람에게 특별히 부탁했고,..”라고 했다고 박승하 명예교수가 건대신문과의 대담에서 밝혔다.

독특한 삼각꼴 외관에 복잡하고 비효율적이란 지적도 있지만 김중업은 캠퍼스 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을 지향했던 유석창 박사의 뜻에 따라 여러 번의 설계변경을 거쳐 건물을 완성했다고 한다. 건대는 좁은 중앙도서관을 대신해 상허기념도서관을 새로 짓는데 이것을 김중업의 제자 장석웅이 맡았다.

10회 차에 걸친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장장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서울 시내에 있는 김중업과 김수근의 작품을 다 돌아보진 못했지만 최대한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했다. 시 외곽에 뜩 떨어져 있는 작품들은 주변 건축, 역사, 문화자원과 함께 돌아보는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기회를 준 서울시 건축기획과에 감사를 드린다. 또한 꼼꼼한 준비로 유익한 정보를 잘 전달해 준 해설사께도 감사를 전한다. 무엇보다 앎의 열정을 가지고 두 건축 거장의 여정에 함께한 서울 시민께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참고문헌>

-김중업(1983), [신년특집] 서강대학교 본관, 월간 건축문화사 1월호
-이승준(2014), 건축가 김중업의 주택설계에 나타난 시기별 특징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
안병의(1993), 김중업의 작품과 건축관에 대하여, 건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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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워치(2018), 홍대 '노랑계단' 가 보셨나요?, 안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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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1984),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열화당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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