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썸머 워즈’(2009)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와 ‘늑대 아이’(2012)의 사이에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내놓은 애니메이션으로 지난해 일본 내 ‘여름을 그린 애니메이션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묻는 한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워낙 호불호가 엇갈려 논란마저 일고 있다.

가상공간 오즈(OZ)가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한다. 사람들은 제 아바타를 통해 오즈에서 놀이, 소통, 비즈니스 등 실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수학 천재 고교생 겐지에게 선배 나츠키가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그녀 할머니의 90살 생일잔치가 열리는 시골 종가에 함께 가자는 것.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던 겐지는 무척 당황한다. 나츠키는 할머니에게 그를 애인이라고 소개하면서 마치 손녀사위 심사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 이 집안은 전국시대 그 지역 영주인 진노우치 가문의 16대 장문이다.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는 재산은 날렸지만 대저택과 유력 인사라는 인맥은 남겼다.

겐지는 나츠키의 다양한 친척들과 어울려 외로운 자신의 가정에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가족의 따스함을 만끽한다. 집안을 구경하던 도중 식구들과 안 어울리고 컴퓨터에 빠져 사는 소년 카즈마를 알게 된다. 10년 전 집을 나간 와비스케 삼촌이 나타나자 할머니를 비롯해 친척들이 적대적으로 대한다.

그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외도해 낳아 데려온 혼외 자식. 재산 일부를 처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었다. 휴대 전화로 많은 숫자의 문자를 받은 겐지는 그 난수표를 푼다. 그런데 오즈가 해킹 당한다. 미국 국방성의 AI 러브 머신이 겐지의 계정을 해킹해 그의 아바타를 훔쳐 오즈를 휘젓고 있는 것.

언론은 그 내막을 모른 채 범인이 겐지라고 보도한다. 그러나 와비스케는 러브 머신은 자신이 개발했다고 고백한다. 미 국방성의 속셈을 모른 채 프로그램을 팔았는데 이런 변이 생겼다고. 러브 머신은 회원 절반의 계정을 해킹해 힘을 키운 뒤 핵발전소에 우주선을 떨어뜨려 인류를 멸절시키려 하는데.

종가에서의 친척들의 대화는 우리네 정서와 유사한 점도 많지만 일본의 역사를 모르면 각 시추에이션이 이해가 안 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패권을 잡기 전 전국시대 때 하극상과 배신이 난무하는 혼돈을 겪었다. 지역 영주들의 패권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치던 시절.

나츠키의 집안은 그 아수라장 같은 정세 속에서 꿋꿋이 가문과 지역의 자존심을 지키며 히데요시의 거대 중앙 권력에 맞서 싸운 자존심 하나로 버텨 왔다.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친척들은 단결심이 강해 집안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또한 각계 유력 인사들과의 친분도 상당히 돈독하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확하게 공존하는 이항대립이다. 할머니는 아날로그, 오즈는 디지털이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옳다는 게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아날로그 정서 중에서 가족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지키자는 주장이다. 그래서 가족과 식사를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다.

그건 할리우드의 모든 영화들의 공통적이고 기초적인 주제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러브 머신을 오즈에 침투시킨 장본인은 미국 국방성. 물론 인류 멸망이 아니라 단순히 러브 머신의 성능 시험이 목적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 미국은 지구의 수호자가 아니라 파괴자였던 것.

할머니가 대대로 내려온 창을 들고 와비스케를 겨냥하며 “나는 용서하여도 다른 사람들(조상과 친척)은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미국에 러브 머신을 넘긴 행위에 대한 벌이다. 생일잔치를 앞두고 갑자기 사망한 할머니가 남긴 편지 속 “가장 나쁜 건 배고픈 것과 혼자 있는 것.”이란 글이 주제이다.

결국 그건 가족이 한 집에서 함께 식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아주 평범하고 기초적이지만 현대에서는 결코 이루기 쉽지 않은 가족의 끈끈한 커뮤니케이션을 웅변하는 것이다. 만 89살인데 90살 생일인 점, 배우자감을 친척들에게 소개하고 인정받는 것 등 우리네 옛날 정서와 비슷한 소재가 많아 친숙하다.

단, 고스톱 찬가 같은 설정은 이 영화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을 결정적으로 가를 변수이다. 화투와 고스톱 게임은 일본이 원조이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놀이 문화이다. 심심풀이라면 일본이 만든 놀이라고 하더라도 그리 나쁘지 않겠지만 그게 노름 수준이 되면 달라진다.

이 작품 속 고스톱의 사이즈는 웬만한 노름이 아니라 인류의 생멸을 판가름하는, 인간 입장에서 볼 때는 가장 규모가 큰 노름이다. 겐지와 러브 머신과의 고스톱 대결을 마치 엄청난 무공 대결인 것처럼 잔뜩 과장되게 부풀린 시퀀스는 불편할 수 있다. 마모루의 다른 작품을 기대하면 실망할 듯.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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