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픽사베이

[미디어파인 칼럼=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고등학교 시절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을 읽으며 남자주인공의 한없이 가벼운 삶을 너무나 이해할 수 없었다. 반대로 여자주인공을 보면서는 답답함을 느꼈다. 필자는 아마도 가벼움과 무거움의 중간 어디즈음에 머물고 싶었나보다.

인간은 육체에 갖힌 영혼들이다. 육체만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고통의 근원인 육체를 중시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깨닫는 시간이 올 것이다. 영혼은 자유를 추구하지만 육체가 죽음을 맞기 전까지는 그 육체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다.

명리용어 중 관성은 사회에서의 체면이나 책임감을 의미한다. 이것을 사주원국에 가진 사람, 특히 일지(태어난 날의 땅의 기운)에 둔 사람은 평생 책임감과 친구처럼 지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책임지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늘 책임감을 느끼고 살기 때문에 책임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본인을 옭아매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 책임을 질 일을 구지 만들고 싶겠는가 말이다. 아이러니 하지만 책임질 일을 만들기 싫어 매사에 실수를 안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어찌보면 자유로운 영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관성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나의 발목을 잡아 그 자리를 지키면서 끝가지 책임을 완수하라고 강요하는 요인인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기본적인 책임감은 필요하다. 지금은 사회가 다양해지면서 관성의 중요성이 조금은 흐려졌지만, 불과 몇 년전만 해도 관성의 유무는 사회생활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관성이 없는 사람들은 소위 말해 조직에 적응을 잘 못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여자의 경우는 결혼생활도 힘들다라고 해석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도 관성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시작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보상이 따른다. 나이들어 안정되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삶의 즐거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늘 강박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바랄 뿐 주변을 살펴보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삶에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하면서 인간은 학문과 예술과 종교를 만들어냈다. 정답은 없지만 그러한 모든 행위들이 결국 풀지 못하는 인간의 숙명을 극복해보려는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도 살면서 봉착하는 문제들을 속시원히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 모든 문제들은 결국 삶의 또 다른 모습인 죽음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관성은 마치 영혼을 길들이는 감옥과 같다. 이 감옥을 빠져나오면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맬것이 분명하니 너는 이 감옥에서 평생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라는 주문을 거는 교도관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 자신을 가두는 존재는 우리 스스로이다.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어찌보면 그곳을 빠져나올 용기가 없는 것일수도 있다. 모험이 두렵고 자유가 두려운 것이다.

인간은 인정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니다. 모든 삶을 부딪히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여야 한다. 영혼이 육체를 빌려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는 결국 실수의 결과로 나타나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데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수동적인 결과물이다.

한번쯤은 궤도에서 이탈해 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가끔 실수를 해보는 것도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분명 새로운 에너지를 접할 것이고 시야를 더 넓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우주는 실수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절대!

▲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

[오경아 대표]
건국대 철학과 졸업
전 수능영어강사(번역가)
현 비엘티 아케아 대표
현 교환일기 대표
현 세렌 사주명리 연구소 학술부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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