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 칼럼=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한 아이가 부모님과 항해도중 배가 난파되면서 구명보트 위에서 망망대해를 떠 도는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그 보트위에는 그 아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타고 있었다. 쉽게 말해 적과의 항해인 셈이었다. 그 적은 바로 벵골호랑이. 이쯤에서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이다.

서양인들에게는 다소 신비스러운 동양적 세계관과 뛰어난 영상미 덕분에 아카데미상을 여러 부분에서 받았다. 그 영화를 보던 당시에 필자는 명리학을 공부하기 전이었는데 명확하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감독이 의도한 바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에게 해준 인간이 만든 종교의 종류가 중요한 것은 아니란 말이 평소 필자의 생각과 같아서 훅하고 다가왔다. 인간보다 먼저 였던 존재 즉 자연이 신이라는 필자의 생각과 같은 맥락이었다.

호랑이의 존재를 실제하는 호랑이로 인식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상징하는 바를 정확히 몰라서 이런 저런 해석을 했을 것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 소년이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호랑이 때문이었다. 아이의 내면에 있는 야생성을 벵골호랑이에 비유해 보여줬을수도 있고 인생에서 우리가 늘 겪어야 하는 고난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다. 아니 둘다 일수도 있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벵골호랑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하거나 두려워한다. 그것이 자신을 더 강하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란 사실을 모른다. 고난이나 스트레스가 없는 환경에서 사는 생명체의 생존력은 그 반대의 환경에 사는 생명체에 비해 극히 낮다.

음과 양, 어둠과 밝음 중에서 밝음만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어두운 밤이 없는 하루, 추운 겨울이 없는 사계절을 생각해보라고. 활동만 하고 쉬면서 충전하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의 수명은 반으로 단축될 것이라고. 쉬운 것에 길들여진 생명체는 힘겨운 환경이 오면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반대로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생명체는 복원력이 뛰어나다. 결국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중심으로 돌아오려는 태도... 그것이 핵심이다.

관점을 바꿔 생각해보면 서로 다른 성질의 음양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있다. 즉 하루라는 시간속에 낮과 밤이 공존하고, 계절이라는 시간속에 여름과 겨울이 공존한다. 심리학자 칼 융의 이론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남자의 마음속에 있는 여성적인 인격인 ‘아니마’가 있고 여자의 마음속에 남성적인 인격인 ‘아니무스’가 있는 것처럼.

▲ 사진 출처=픽사베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보여지는 부분이 그 사람의 일부인 것은 맞다. 어떻게든 사람은 자신안에 내재된 에너지를 밖으로 표출하면서 사는 존재이다. 그것이 패션이 되었든 헤어스타일이 되었든 소지품이 되었든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명품으로 도배를 했다고 그 사람이 명품이 되지 않는 것처럼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영혼의 풍요로움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양을 공부하면 겉모습의 화려함에 치중한다는 것은 내면의 빈곤함을 숨기기 위함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유약해 보이는 소년과 사나워 보이는 벵골호랑이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존재가 아니다. 약함 속에 숨은 강함, 강함 속에 숨은 유약함 이런 조합이 음양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호랑이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으르렁댔다. 소년의 유약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말이다. 하지만 결국 소년의 내면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고 생각하면 그 소년의 무의식속 생존본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반증인 것이다.

당신안의 벵골호랑이는 어떤 모습인가? 

▲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

[오경아 대표]
건국대 철학과 졸업
전 수능영어강사(번역가)
현 비엘티 아케아 대표
현 교환일기 대표
현 세렌 사주명리 연구소 학술부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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