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픽사베이

[미디어파인 칼럼=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필자의 사무실 밖 풍경은 도심 속 공원이다. 사계절 변화하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날 여행에서 돌아와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가슴벅찬 행복감이 느껴졌다. 늘 보던 풍경이었지만 잠시 눈에서 멀어져있는 동안 새롭게 단장하고 내 앞에 선 듯한 느낌이어서 였을까. 하지만 그 감흥은 다음 날부터 무참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 날 커피숍에 문을 여는 순간 에어컨의 냉기에 행복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맺혔던 땀이 축축해지면서 체온이 내려가고 청량감이 서늘함으로 바뀐다. 비슷한 예로 배가 너무 고파 밥을 떠먹는 첫술은 너무나 행복하지만 배가 불러오면 그때부터는 먹는 것이 차라리 고통이다.

행복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저 힘든 문제가 없고 편안함과 충만함이 지속되는 것이 행복일까? 위의 사례와 같이 지속되는 편안함과 충만함은 없다. 지루함과 나태함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여전히 많은 이들이 SNS에 보기 좋은 떡과 같은 사진들을 올리면서 누가 더 행복해보이는가 식의 경쟁을 한다.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느껴지는 행복감이란 얼마나 가식적인가. 물론 좋은 것을 공유한다는 취지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유의 의도보다는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타인의 확인을 요하려는 의도가 더 다분하다 하겠다.

그렇다고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쟁이라는 누명을 씌울 순 없는 일이다. 그것이 현상이든 자신이 믿고자 하는 신념이든 간에 말이다. 고통의 시간에도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자라면 그 자격은 충분하다. 어찌보면 행복하다는 말을 내뱉을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은 이미 불행의 시간을 겪고 온 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순간의 행복이 아닌 불행과 행복이 섞여 있는 삶의 과정을 밟고 온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행복은 말보다는 현상이다. 행복한 순간이 지속되면 그것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행이란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성질의 변화는 겪을거란 말이다. 현상을 말로 표현하면 이미 그 현상은 변질되어 가는 중이다. 인식은 현상을 앞설 수 없다. 더구나 사람의 특성 상 인식한 현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함으로써 확신을 얻으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니 여러 번 입을 통해 나온 말이 그 상태를 온전히 보전하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 사진 출처=픽사베이

몸이 일부가 붙어 있는 채로 태어난 쌍둥이를 샴쌍둥이라고 한다. 인격은 두 사람인데 몸은 한 사람이다. 완전한 두 사람도 아니고 완전한 한 사람도 아니다. 행복과 불행도 이러한 모습이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몸뚱이에 서식하는 존재들이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걸어가는 방향과 움직이는 모습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행복의 다른 얼굴은 불행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밤낮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밤이 다하니 날이 밝고 낮이 끝나니 밤이 되는 것처럼, 행복과 반대 선상에 있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다하고 나면 불행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행복한 것만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결국 그 행복한 것의 끝에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행복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불행을 찾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다소 냉소적인 편이었던 필자는 오히려 그 반대로 고통을 겪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저 말이 맞다라는 생각을 했다. 행복한 삶을 원하는 자들이여, 불행을 견뎌라. 그 시간은 오롯이 행복을 향해 나있는 길일 것이므로.

▲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

[오경아 대표]
건국대 철학과 졸업
전 수능영어강사(번역가)
현 비엘티 아케아 대표
현 교환일기 대표
현 세렌 사주명리 연구소 학술부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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