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수의 뮤직톡톡] 1989년 클라우스 킨스키의 파가니니는,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기보다는 그 음울한 색채며 느낌으로, 파가니니의 어두운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영화이다. 파가니니를 연출, 연기한 킨스키의 영화 속 광기어린 모습은 그의 전작들과 연장선상에 있는데, 독일의 명배우 킨스키는 전작들에서도 열정이란 표현으로는 부족한, 광기 가득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으로 일관한 컬트배우이다. 그의 실제성격도 불같고 광적인 면이 있다는 등 사생활에 대한 소문도 무성한데, 그러한 킨스키의 이미지는 역사 속 파가니니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기묘하게 유사한 느낌을 주고 있다. ‘나는 일정이 가장 짧고 제작비가 가장 많은 영화를 선택한다’ 라는 킨스키 말은, 여러 가지의 병과 그 치료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으로, 연주회 티켓 값을 배로 올려 유럽을 돌며 많은 돈을 벌어들인 파가니니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이렇듯 킨스키는 자신과 닮은 파가니니에게 매료되어 그의 영화제작에 열을 올렸던 것은 아닐까.

  https://www.youtube.com/watch?v=3dKES9EFjSY  Paganini 1989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로서의 파가니니의 모습이 킨스키의 파가니니에서 표현되는데, 미성년자와의 스캔들, 자선음악회에 참석하지 않는 구두쇠, 악마적 소문과 이미지 등으로 유명한 파가니니지만 그의 아들에 대한 사랑만은 신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아들 아킬레는 1824년 여가수 비안키와의 사이에서 얻은 유일한 혈육으로, 그녀의 극심한 질투심 때문에 파가니니는 1828년 아킬레의 양육권을 그녀로부터 사고 헤어지게 된다. 그가 무리한 연주일정을 강행하며 돈을 모았던 이유도 아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그야말로 악마와 같은 병 때문에 초조했고, 항상 죽음을 의식해야만 했던 것이다. 연주여행에서는 아들을 위해 호텔보다 가정적인 펜션을 선호했고,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혹독한 바이올린 훈련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아, 아들이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파가니니의 모습이 거리에서 연주하는 아이를 돕는 모습으로 표현 되는데, 독일의 국가가 멜로디로 사용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ZgeLv1kyi4 Paganini 1989

파가니니는 1894년 12세 되던 해부터 고향 제노바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돌며 교회의 솔리스트로 활약하게 된다. 가는 곳마다 청중의 수준을 고려하여 때와 장소에 맞는 선곡을 하였고, 거기에 놀라움을 요소를 가미하여 청중들에게 각인되어 갔다. 악마라는 소문은 1802-1805년에서 기인하는데, 그 시간동안의 기록이 없고, 연인을 살해하고 감옥살이를 했다거나 사랑에 빠져 칩거 생활을 했다는 등의 소문에도 파가니니 자신조차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1796년부터 이탈리아 도시들은 차츰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1805년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루카의 새로운 군주인 엘리자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아 궁정음악가로 임명받게 된다. 그녀는 매사에 빈틈이 없고 권위적인 성격이었지만,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을 때면 매번 실신하였다고 전해진다. 1809년까지 궁정음악가로 지내면서 군주 엘리자와의 애정관계를 추측케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1810년부터는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회괴한 소문들과 함께 이탈리아 곳곳을 바이올린으로 점령해 나가게 된다. 그에게 생긴 각가지 병들로 인하여 알프스 너머 연주여행을 가려는 계획은 점차 미루어지고, 드디어 1828년 오스트리아 빈으로부터 시작되는 알프스 너머 외국에서의 연주여행은 건강이 악화되어 바이올린을 잡을 수 없게 된 1834년까지 이어진다.

킨스키의 파가니니는 어린여성만을 탐하는 호색한이다. 반면 2014년 개봉했던 불멸의 연인으로 유명한 버나드 로즈감독, 데이비드 가렛 주연의 파가니니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진실된 사랑을 구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나이 49세인 1831년, 16세 샬러트 와트슨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가 파가니니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어느 영화가 진실인가라고 한다면 둘 다 인 듯하다. 파가니니는 미성년과의 도피행각으로 고소당했었고, 샬롯 역시 미성년이었다. 그 외에도 그의 인기가 대단했던 만큼 많은 여성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그런가하면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교양있고 아름다운 여성과 진실한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기를 갈구하는 내용도 자주 등장한다. 그를 사랑했던 여성도 많았고, 그가 사랑했던 여성들도 많았지만 결국 그는 진정한 반려자를 찾지는 못했다.

2014년 파가니니를 연기한 데이비드 가렛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바이올린계의 수퍼스타로, 크로스오버 앨범으로도 유명하고 드라마 왕과나(2007 sbs) ost에도 참여한 인기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신경과민과 요추척수질환, 매독과 몽땅 뽑아버린 치아 때문에 악마라는 소문에 불을 지폈던 파가니니가, 오로지 그의 명성과 마술과도 같은 연주로 여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영화 속 가렛은 그의 연주도 일품이지만, 매력적인 모습 또한 보는 이를 설레이게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wKiDP433lNI TheDevil's Violinist-Caprice No 24

그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소’ 1802-1805년의 행적이 불문명한 시간이 악마라는 소문의 원인이 되었다면, 파가니니가 남긴 말은 죽어서 까지 안식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1840년 죽음을 앞둔 파가니니에게 찾아 간 사제가 다그치며 진실을 물었을 때, 파가니니가 했다던 유명한 그 한마디는 냉소적인 파가니니의 객기였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는 파가니니 스스로 악마와 결탁한 자임을 인정하는 순간이었고, 36년간이나 묘지없이 떠돌게 되는 불행의 원인이 된다. 임종을 맞이한 니스에서도, 그가 묻히기를 희망했던 고향 제노바에서도,

자신의 별장 정원에서조차 악마와 결탁한 자의 시신을 묻을 수 없다는 이유로 허가 받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던 파가니니의 관은, 14살 때 아버지를 여읜 아들 아킬레가 50세가 되던 1876년 상속받은 토지 일부와 거금을 헌납하고야 겨우 교회묘지에 안장된다. 그리고 1896년 파가니니의 별장근처인 파르마의 새 묘지에서 기념비와 함께 영원한 안식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위대했던 음악가의 별명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칭이, 바이올린의 귀재 파가니니의 너무도 특별하고 놀라운 바이올린 소리에 대한 극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 되고 말았다. 깡마르고 병색 짙은 파가니니의 모습, 진정 사랑을 갈망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파가니니, 그의 냉소적인 표정과 말투, 한 시대의 우상이었고 동시에 조롱의 대상이었던 파가니니. 그의 면면을 떠올리다 보면 악마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Vy6N077xXZs The Devil's Violinist - Io Ti Penso Amore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4번 2악장에 가사를 붙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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