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치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중략>----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김경미,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비망록> 부분

[김자현의 시시(詩詩)한 이야기] 나는 스물 넷이고, 대학교 3학년이다. 올 여름에 나는 몇 군데 언론사 인턴에 떨어졌다. 개중에는 거듭 면접을 보러 오라하여, 꽤 기대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7월이 됨과 동시에 나는 할 일이 없었다. 막상 준비되지 않은 7월이 코앞에 들이닥치니 난감했다.

시간이 많아 친구들의 SNS를 둘러봤다. 한 친구는 차곡차곡 돈을 모아 해외 여행을 떠났다. 몇몇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또 대다수는 각종 인턴이며, 토익이며 토플이니 하는 무수한 점수며 자격증들을 따기 위해 바쁜 모습이다. SNS는 주로 무언가를 하는 이들의 무대여서, 나처럼 무언가를 해보려다가 떨어진 사람은 은근슬쩍 주변의 바쁨을 염탐하고 배 아파하기도 하며, 나의 상황과 견주어 조바심을 낸다.

자취방에도 가득한 무더위를 피해 도서관으로 갔을 때, 만난 사람들 앞에서 나는 괜히 말을 더듬었다. 친구들은 인사치레로 도서관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소설책을 보러 왔다고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는데, 어쩐지 도서관에 책 읽으러 왔다는 말이 할 일 없는 사람의 말처럼 들릴까 하여 그랬다. 친구들은 각각 한자리를 잡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거나 영어공부를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돈이라도 벌어볼까 하여 알바를 몇 군데 지원했지만 배부른 말로 원하는 시간을 협상하다보니 알바마저 퇴짜 놓이고, 서울 회기동 자취방에서 나는 다시 한가했다. 근근히 단기 알바라도 해서 생활비를 보태고, 보태진 생활비를 가지고 한가함을 기회삼아 꾸역꾸역 놀았다. 연애도 하고, 술도 먹고, 오랜만에 고향집에 길게 눌러앉아 엄마 밥도 거듭 몇 끼니 먹었다. 그러다가 다시 복권을 사듯 글쓰기 대회에 글을 끄적여 내면서, 아직 발표되지 않은 심사결과의 기대감을 갉아먹으며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신생 칼럼 전문 미디어에서 칼럼리스트를 뽑는다기에 재밌겠다 싶어 지원했고, 이 글을 쓰면서 또 남은 방학의 한주를 나고 있다.

2014년을 기준으로 청년고용률은 40%를 가까스로 넘겼다. 절반 이상을 좌절하게 하는 부정적인 지표 속에서, 내 또래의 방학은 자소서에 쓸 한 줄을 더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다. 이 시기의 정지 상태, 즉 한가함은 유죄다. 그래서 종로며 강남의 학원들은 아침저녁으로 호황이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결코 그러한 노력들을 비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안 할 것이라는 말도 아니다. 나도 언젠가 학원에 한자리를 꿰차고 영어와의 사투를 벌일 것이다. 다만 지금 나는 그 일들을 하고 싶지 않으며, 해도 잘 안될 것 같으니 대신 시원한 도서관에 앉아 읽고 싶은 책이나 한나절 읽고 싶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지 않겠냐는 말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스물넷을 더듬는다. 스물네 살을 더듬어보니 후회가 좀 되나보다. 비망록에 남길 정도로 꽤나 아쉬운 모양이다. 그런데 아쉬워하는 내용을 살펴보니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을 텐데’ 아쉬워하고,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어도 즐거웠을 텐데’ 아쉬워한다. 자격증을 못 따서, 영어공부를 안 해서 아쉬운 것이 아니다. 행복하지 못한 것, 사랑하지 않은 것, 그래서 즐겁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한낱 위로나 될 수 있는 말이지, 청춘에게 아픔을 강요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교묘히 말을 돌려 청춘과 아픔의 결부를 당연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청춘도 분명 아픔을 피하여 행복하고 사랑하고 즐거울 자격이 있다.

그리하여 시의 마지막 연은, 절벽에도 꽃 핀다는 말이다. 무엇이라도 띄워서 강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문득 스물다섯이라 해도 쓰다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들, 잠시 멈춰있더라도 모두 힘을 내시길. 멈춘 김에 후회 없이 즐거우시길. 무언가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도 다급하지 마시길. 즐거움도 허용되는 청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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