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일의 ‘롤링인더딥’] “90년대 갱스터 힙합을 섬세하게 표현 : 아프로 파마와 닥터드레의 음악, 갱단마다 다른 색 셔츠 & 반다나(두건)”
“책, 영화와 달리 게임 플레이어의 진행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문화의 다양한 모습”
“게임이 전달하는 이미지가 곧 문화 그 자체라는 오해를 벗어나도록 노력 필요”

[Intro]
보라색 두건을 쓴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한 명이 피를 흘리면서 도망친다. 초록색 두건과 셔츠를 입은 같은 편 갱 단원들이 총을 쏘지만 잘 맞추지 못한다. 달려가서 너클로 도망치는 상대편 갱 단원의 등짝에 주먹을 꽂는다. 라디오에서 아이스 큐브의 'It was a good day'가 나온다. 해가 질 즈음 집에 도착해서 세이브를 누른다.

게임을 끄자 조금 정신이 없다. GTA산안드레아스를 하느라 방금 전까지 90년대 미국에 있다가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실제로는 아침인데도, 벌써 고단하고도 뿌듯한 하루를 보낸 것 같다.

GTA산안드레아스는 90년대 미국의 서부 흑인 문화를 게임 속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플레이어는 음악이나 글, 영상으로는 맛보지 못했던 생생한 흑인문화를 게임으로 만날 수 있다. 문득, 게임은 문화의 발전에 다른 매체들과 다른 독특한 역할을 할 것만 같다.

[Verse 1] 게임 제작 = 문화 복원
게임 회사들이 문화적 배경을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 쓰는 지는 이미 ‘삼국지 시리즈’나 ‘엘더 스크롤 시리즈’ 등 수많은 게임들을 통해 볼 수 있었다. ‘GTA 산안드레아스’ 역시 제작사인 ‘락스타게임즈’가 90년대 미국 서부의 할렘가를 재현하는 데에 얼마나 섬세하게 신경썼는지 보여준다.

90년대 힙합문화의 키워드는 ‘갱스터’다. 당시에 유행했던 투팍과 비기, 닥터드레와 스눕독  등의 래퍼들은 대부분 갱스터 출신이었다. 힙합은 당시 흑인들에게 있어서 유희일 뿐만 아니라 거대한 사업거리였다. 자연스럽게 힙합은 흑인들의 삶에 녹아들며 흑인 문화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다. 그래서 90년대에는 흑인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옷, 라이프스타일에까지 갱스터 힙합이 영향을 끼쳤다.

GTA산안드레아스는 이런 문화적 특징을 게임 곳곳에 녹여냈다. 당시에 유행하던 치카노(미국 서부와 남부에서 주로 활동하는 히스패닉계 사람들) 힙합과 갱스터 힙합의 영향으로 모든 캐릭터들은 셔츠의 맨 윗 단추만 잠근다. 갱스터들은 자신이 속한 갱단의 색깔이 들어간 옷을 입고 종종 반바지에 흰색 양말을 종아리까지 올려 신기도 한다. 미용실에 들어가면 ‘아프로 파마’와 ‘플랫 탑 페이드 헤어’, ‘콘 로우’ 등 90년대 흑인 뮤지션들이 자주 하던 머리를 캐릭터에게 시도해볼 수 있다.

락스타게임즈는 사운드트랙에도 많은 신경을 쏟았다. 게임 속 라디오를 켜면 90년대 초반 미국의 라디오에서 자주 나오던 음악들이 나온다.(2004년, 락스타게임즈는 이 음악들을 편집해 앨범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심지어 주인공 캐릭터가 90년대에 유행하던 힙합 그룹 ‘사이프레스 힐’의 멤버를 닮은 점이나 NPC 중 한명이 닥터 드레가 있던 힙합 그룹 ‘NWA’의 ‘Eazy-E’를 쏙 빼닮기도 했다. 이외에도 자유도라는 게임 매체의 특성이 더해져 플레이어의 취향에 따라 레이싱을 하며 90년대의 캐딜락들을 타보거나 스트립 클럽의 촌스러우면서도 퇴폐적인 분위기들을 느껴볼 수 있다. 이 모든 디테일들이 어우러져 GTA산안드레아스 속에서는 문화가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단편’이 아니라 ‘장면 그 자체’로 재현된다.

[Verse 2] 게임으로 문화 접하기 = 이미지로 문화 입문하기
특정 문화의 이미지를 생생히 느껴볼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좋은 첫 걸음이 있을까?

게임은 다른 매체들보다 문화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 책을 읽을 때 독자는 책 속에 등장하는 문화를 머릿속으로 상상해야 한다. 라디오와 녹음기는 우리의 상상 속에 그려졌던 문화에 청각을 색칠했다. 영화가 등장하자 문화의 시각과 청각은 모두 색칠되었다. 아직 감독들이 디테일하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지만, 4D영화관이 보급되며 문화는 향기와 촉감까지 생생하게 전달된다.

게임은 영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비자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다른 매체의 소비자들과 달리 게임 소비자들은 플레이어가 문화 속에 들어가 하나의 주체가 된다. 게임은 소비자의 주체성과 거기서 생겨나는 변수들로 텔레비전의 브라운관과 소파, 영화관의 스크린과 객석사이의 여백을 채우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는 게임의 주체가 되어 게임 속에 숨겨진 문화들을 더 생생하고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 예로 GTA 산안드레아스가 플레이어들이 게임 진행에 별 영향을 안 미침에도 불구하고 미용실에 들어가서 캐릭터의 머리를 바꿀 수 있도록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그 과정을 몇 번 거치고 나면 플레이어는 90년대의 흑인들이 어떤 머리를 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플레이어들은 기호에 따라 스트립 클럽이나 패션, 차 디자인들을 체험해볼 수 있다. 이처럼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각자의 기호에 맞는 문화 모습들을 하나의 ‘이미지’로서 생생하게 전달한다.

[Verse 3] 우리에게 남은 압락사스
얼마 전 진중권은 ‘이미지 인문학’이라는 책을 썼다. ‘이미지 인문학’은 이미지가 현실을 덮어버리는 현실에서, 이미지가 꼭 실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인의 공간이라고 알려진 홍대거리에서 사실은 젠트리피케이션(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 관광지로 소문나면서 땅값이 올라 지대를 견디지 못한 예술가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고, 법원 앞에 뒤케의 상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법 절차가 정의롭지 않은 것이 그 예다.

마찬가지로 게임의 이미지를 통해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문화는 단편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단순히 특정 문화의 재화나 이미지만을 접하고 그 뒤에 숨겨진 정신적 기반, 고뇌, 쟁점 등은 알지 못한다면 그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을 것이다. 물질문화뿐만 아니라 정신문화를 포함한 그 문화의 전반을 접해야만 ‘문화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게임은 첫걸음으로서 톡톡히 한 몫을 하리라고 기대한다. 이미지를 통해 특정 문화를 접한다는 것은, 그 문화에 입문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데에 있어서 효과적인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홍대를 설명할 때는 ‘예술의 거리’라는 말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법원을 설명할 때에도 뒤케를 설명해야만 한다. 다만 이미지들로 대변되느라 가려졌던 그 문화들의 진면목을 알아가는 과정이 잘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지를 보고 문화에 첫 걸음을 디딘 입문자들에게 그 이미지를 깨주는 것이 문화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게임 회사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들의 과제일 것이다.

[Outro]
조카들의 한문공부를 위해서 ‘마법 천자문’을 산다. 조카가 마법 천자문을 통해 한문의 언어학적 가치와 한문이 아시아 문명의 발달에 끼쳤던 영향을 이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마법 천자문을 사준다. 조카는 이 책을 통해 한문을 겉핥기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훗날 한문의 가치를 이해할 때 그 ‘겉 맛’을 통해 한문의 진면목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이 문화에서 지니는 위치는 마법 천자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게임을 통해 어떤 문화를 이해하는 첫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그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 그 문화가 어떤 이미지를 지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게임은 문화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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