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윤의 문화오픈런] 나는 약자입니다. 나는 소수자입니다. 범박한 말로 ‘-아웃팅’ 할 수 없는 슬픈 사회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같은 좌표에 서 있는 사람들, 혹은 그보다 더 하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래서 바야흐로 혐오사회이다. 불평등에서 오는 분노가 위로 가지 못하고, ‘수평 폭력’을 일삼는 것이 바로 혐오사회의 맨얼굴이다. 여성혐오, 동성애자혐오, 집단 따돌림 등 ‘혐오’는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사회병리 현상이다. 심지어, 혐오주의는 ‘-이기 때문이다’라는 명분마저 갖추며, 손가락질의 정당성 또한 보장한다. 최근 혐오의 양상은 심판대 위에 괴물을 올려두고 돌팔매질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명분의 허울, 괴물을 ‘만드는’ 박사
‘괴물’에게 돌을 던지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괴물’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혐오의 양상을 모두 한 가지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 때문에 혐오한다’라는 레토릭은 혐오의 정당성을 확보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여자가 ‘남자들을 물로 보지 우렁각시, 코스프레 하면서 등골 쪽 빠는 거머리’(최근 논란이 된 노래 ‘성에 안 차’ 가사 중)이고, 왕따 당하는 아이는 ‘적당히 나대지 않아서’ 왕따 당하는 것이고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 중), 동성애자는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는’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의 동성애 내용을 반대하는 신문광고 중) 존재들인가?

돌 던지는 것에 망설임이 없던 사람들은 혐오의 대상이 정말 ‘괴물’인가에 대해, 그리고 만일 괴물에게 혐의가 있다면, 자신들이 돌 던질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대상에게 ‘그런 혐의가 있는지’, 그리고 ‘그 혐의가 돌을 던져도 될 만한 것인지’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일정한 ‘대상은 이렇다’라는 프레임이 작동하여 ‘괴물’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틀에 붕어빵을 찍어내듯, 주체가 만든 프레임에 따라 괴물은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상은 이렇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합리화가 뒤따른다.

혐오의 대상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기 위해, ‘거기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괴물은 자신과 다르다면, 그리고 자신보다 약자라고 비친다면 가차 없이 돌을 던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원래 세상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박사’에 의해 만들어졌듯, 혐오의 대상들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 심판대 위에 올려지는 것이다.

‘을’이 ‘을’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
괴물은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괴물을 만들어낸 자들이 역설적으로 괴물은 사라져야 할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희생제의’ 때문이다. ‘을’이 ‘갑’을 향해 부당함을 표출할 수 없는 사회, ‘을’인 것이 ‘루저’로 취급받는 사회에서 ‘을’은 ‘갑’의 표식을 얻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다. 그래서 프레임을 씌워 괴물을 만들고, 그들에게 돌팔매질을 가함으로써 ‘을’은 ‘갑의 가면’을 쓰게 된다. 희생제의로, ‘을’은 대상과 자신을 구분 지으며 자신이 루저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한다. 나는 저들처럼 ‘사치스러운 김치녀가 아니야’, ‘왕따를 당할 이유가 없어’, ‘정상적인 사랑을 하고 있어.’ 등은 일종의 주술로, 자신은 ‘을’이 아니라는, ‘괴물’과는 달리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알리바이를 만든다.

이는 비단 지금의 한국 사회의 혐오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같은 흑인인데도 아프로포비아(afrophobia: 아프리카계 흑인 혐오증)를 보이며 방화와 약탈을 일삼은 남아공 사태 또한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높은 실업률 문제를 ‘갑’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함께 취업 시장에서 싸워야 하는 이민자들에게 돌리는 것, 또한 그들 중 아프리카계 흑인들에게 폭력을 일삼으며 분노를 해소하는 것은 ‘을’이 ‘을’을 혐오하는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이다. 

창조주의 이름, ‘프랑켄슈타인’
지금도 타인에 대한, 특히 약자에 대한 혐오는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을’은 더욱 약자라고, 소수자라고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는 ‘루저’로 남는 척박한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사회에서 ‘갑의 가면’을 쓴 ‘을’들은 ‘슈퍼-을’인 ‘괴물’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괴물’의 낙인이 찍힌 존재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여자들은 자신이 ‘김치녀’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개념녀’를 자청하고,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왕따의 가해자가 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수순이다.

‘프랑켄슈타인’. 우리는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이름은 괴물을 만든 박사의 것이다. 괴물은 본래 이름이 없었으나, 현대의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기표는 ‘박사’와 ‘괴물’이라는 두 가지의 기의를 가진다. 그렇게 괴물은 창조주와 완벽히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갑의 가면’ 아래에 있는 ‘을’의 맨얼굴을 다시 가리킨다. ‘갑의 가면’ 아래, ‘을’의 맨얼굴은 괴물의 다른 이름 프랑켄슈타인이다. 약자가 약자에게 혐오를 보이고 서로를 괴물로 만들어가는 이 비극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괴물을 만들고, 다시 괴물로 취급되고 있다.

먹이사슬 같은 이 극악한 사회구도 속에 볼 수 있는 것은 ‘갑’의 얼굴뿐이다. 그것이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최종 승자로 남은 진짜 ‘갑’인지, ‘갑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을’인지 알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 서로를 괴물로 만들며, ‘갑’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는 사회에서 남는 것은 ‘프랑켄슈타인’들의 슬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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