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유정의 독자적(讀者的) 시선]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는 말을 신뢰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담보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일들은 인과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은 때로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고, 방어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대문호 로맹 가리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주인공 레니에 역시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주는 안정감을 믿기는 마찬가지다.

이 단편의 공간적 배경은 새들이 죽어가는 해안가와 거기에 인접한 작은 카페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이 왜 거기에서 죽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으나, 주인공 레니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레니에가 한적한 해안가에 카페를 차린 것에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전투에 참전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경력 때문에 레니에는 파괴적이며 인간성을 상실한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피신해, 아름다우며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그는 바닷가에서 삶을 영위하며, 바다에서 “영생의 이미지, 궁극적인 위안과 내세의 약속”을 본다. “다른 사람들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히말라야의 동굴에서 생을 마치듯이”, 그는 페루의 해변까지 도망 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냉소적이고 피로하며, “죽고 싶다는 만만찮은 욕구”로 대변되는 깊은 고독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어떤 여자가 나타난다. 여자는 무슨 사정인지 남편에게서 계속 도망치려고 한다. 그녀는 사육제의 남자들에게 납치당해 페루의 해변으로 옮겨졌다. 여자는 강간당할 동안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으며, 그 일이 끝난 이후에는 자살하기 위해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레니에는 그런 여자를 보며 “언제나 설명이 뒤따른다. 새들조차 이유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레니에에게 여자는 필연이다.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슴 아래 두 마리의 새가 살아서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고독을 느끼며 살아갔던 레니에가 여자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희망이다.

레니에가 그 여자에게서 희망을 느끼고, 그 여자를 위해 권총으로 그녀를 강간한 남자들을 쏘아 버리려고 하는 순간, 그에게 고독보다 깊은 절망이 찾아온다. 여자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그에게로부터 끈질기게 도망치는 여자를 찾아 “세계일주”를 한 남자다. 그는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순 없”다며 여자를 심리학 교수인 ‘몬테비데오로 귀즈망 교수’에게 데려가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비상식적인’ 행위를 하던 여자들은 그에게 심리치료를 받고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개성을 몰살시키는 폭력성이 ‘심리학’이라는 과학으로 포장되는 글의 뉘앙스에서, 여자는 결국 길들여져 “나무랄 데 없는 주부”가 될 것이라는 최후를 읽을 수 있다. 레니에는 여자와 여자의 일행들이 이어가는 대화를 들으며 “눈을 내리깐 채 그들 사이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여자와의 마지막 순간, 레니에는 죽은 새들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여자의 순수한 옆모습을 바라본다.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 … 이유가 있을 거요”. 여자의 남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여자가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레니에는 더 이상 카페에 없다. 레니에는 결국 조분석 섬에서 일생동안 봉사했던 많은 새들이 그랬듯, 페루의 작은 해안가에서 자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레니에는 시와 바다의 목소리, 자연의 신비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믿음조차 레니에에게 어떤 이유가 되어주지는 않았다. 그는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고독 속에서 결국 자살했고, 그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믿음 아래 필연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여자의 남편은 그가 지켜 왔던 믿음과 동일한 언어로 여자의 순수함을 제거하려고 하며, 레니에는 끝내 자신을 삶의 끝까지 내몰았던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했다. 반면 그가 주체적으로 결정한, 자연에서 살아가기로 한 선택 속에서는 위안과 약속을 봤다는 점이 눈에 띈다.

새들이 페루에서 죽은 것처럼, 레니에와 여자의 남편이 믿은 것처럼,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과학보다도 더 논리적으로 진리를 짚고 있는 ‘이유’ 말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때로 우연에 가깝게 보일 정도로 명징하지 않기 때문에 허무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연도 필연이 되게 만드는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헌데 많은 이들은 내몰리면서도, 납득할 수 없으면서도 이유가 있다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정말 이유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진리가 방어나 합리화를 위해 사용돼서는 안 될 것이다. 도전적으로 밝혀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끝까지 찾아 나설 수 있는 패기를 갖는 것도 청춘만의 특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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