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가 만난 스포츠 人] “국가대표 선수로, 감독으로, 그리고 경기위원장까지. 배구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선후배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진준택 전 KOVO 경기위원장(67)과의 인터뷰는 팬, 그리고 선·후배들에게 대한 감사 인사로 시작됐다. 그는 몇 차례씩이나 ‘배구는 수비와 팀웍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구단들이 성적에 급급해 우리 선수들을 외국인선수들의 들러리로 전락시키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배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며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끔씩 튀어 나오는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가 더욱 정겹게 들린 진 전 위원장을 팬들의 요청에 따라 만났다.

- 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합니다.
▲ 아직도 관심을 가져 주시는 팬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6월(2015년 6월)에 2년 임기 KOVO(한국배구연맹) 경기위원장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은 말 그대로 쉬고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고향도 가고, 가족과 외식도 하고, 책도 좀 보면서 ….

- 배구장에는?
▲ 경기위원장을 마치고는 아직 가지 않았습니다. 굳이 안 갈 특별한 이유는 없고 오랫동안 배구와 함께 생활했으니까 이번 기회에 그냥 편안하게 쉬고 싶어서.

- 궁금하지 않나요?
▲ 뭐, 뉴스보면서 소식은 접하고 있으니까요. 가끔씩 선배, 후배들과 만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옛 이야기도 하고 하니까 기본적으로 알건 다 알지요.(웃음)

- 아쉽지 않나요?
▲ 배구를 하면서 선수로 감독으로 그리고 경기위원장까지, 많은 혜택도 받고 어려움, 즐거움들을 모두 함께 했으니 …. 배구인으로 한 평생을 살아 온 것이 자랑스럽고 아쉬움보다는 감사함이 앞서죠.

- 배구인으로 가장 보람이라면?
▲ (한참 뜸을 들이다가) 선수생활을 할 때는 국제대회 나가서 좋은 성적을 올렸을 때 인거 같고, 감독으로는 아무래도 팀이 우승했을 때죠.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물으니 멍하니 잘 생각이 안 나네요.

- 처음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 키가 커서, 다른 이유는 없어요. 삼척 진주초등학교 5학년 때 …. 군 대항 초등학교 체육대회에 나가기 위해 급하게 팀을 만들었는데 키가 크니까 배구를 해라, 그래서 배구를 처음 시작하게 됐지요. 아마 그 때 내 키가 전교에서 1~2번째였으니까. 또 그 때 배구는 지금처럼 6인제가 아니고 9인제였어요.

- 그때부터 선수로 활동하신 건가요?
▲ 삼척중학교 3학년 때인 1962년에 서울 연수를 가서 6인제 배구를 배워 오신 김창문 선생님이 팀을 창단해 시작했지만 정식 선수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재미있는 건 김창문 선생님이 울진 분이셨는데 그 때 울진은 강원도였거든요. 그래서 삼척중학교에서 근무를 하시다가 다시 울진으로 전근을 가셨어요. 그런데 울진이 행정구역 개편이 되면서 강원도에서 경북으로 바뀌는 바람에 그 뒤로 김창문 선생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 때야 어리니까 생각지도 못했고 지금은 어디 계신지 찾을 수도 없네요.

- 고등학교 졸업은 서울서 했는데?
▲ 처음 개교한 삼척고에 입학했는데 강원 도민체전에 출전한다고 키가 큰 학생들만 모아 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겨울방학 직전에 속초고 코치이신 김용순 선생이 전화번호를 주면서 서울로 오라고 하더군요.

- 그래서?
▲ 그냥 전화번호만 들고 서울로 무작정 왔죠. 서울에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배짱이었는지, 서울에 와서 전화를 하니까 남산공전에 배구팀을 창단했는데 전국에서 키가 큰 학생들을 모집하니까 전학을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학했습니다. 아마 배구와 운명적으로 엮인 것 같습니다.

- 당시 고교 배구 판도나 동기들은?
▲ 서울에는 인창, 경동, 대신, 한성, 덕수상, 부산 동성고가 강팀이었습니다. 남산공전 동기로는 봉석근, 이명근 등이었고 전 배구협회 전무이사를 지낸 박병래를 비롯해 전 서울시청 감독인 최종옥 우철우와 엄세창 박덕구 김길태 이한구 등이 같은 또래들입니다.

- 남산공전서 성적은?
▲ 고교 3년 때인 1965년 제46회 광주 전국체전에서 고등부 우승을 했습니다. 개회식을 하는데 관중들이 너무 많이 몰려 메인스타디움이 무너져 인명 사고도 난 체전입니다. 준결승전에서 부산대표인 동성고를 2-1로 이기고 결승에 경북 대표를 이겨 우승한 기억이 납니다. 또 이해 말 한성, 경동, 동성과 남산공전 4개 팀이 대만서 열리는 청소년대회 파견 선발전을 가져 결승전서 동성에 또 3-2로 승리해 우리 학교가 대표 팀으로 선발됐습니다. 동성고 박병래, 한성고 김영상을 보완해 대만으로 갔습니다.

- 첫 대표 선발이군요.
▲ 학교가 대표팀이 된 거죠. 청소년 대회 기록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대만에는 이기고 일본에는 패했던 거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일본은 넘기 어려운 벽이었지요.

- 여러 군데 실업팀에서 활동했는데?
▲ 처음 체신부에 입단을 한 뒤 봉명광업, 충북시멘트, 아시아시멘트, 충주비료, 한국종합화학 이렇게 팀이 바뀌었지요. 봉명광업이 충북시멘트를 만들면서 시멘트 홍보를 위해 이름만 바꾼 거고 아시아시멘트가 팀을 해체해 6개월 정도 쉬다가 충주비료에서 팀을 인수해 재창단했습니다. 한국종합화학은 충부비료가 역시 이름을 바꾼 거고요.

- 당시 실업 배구는?
▲ 보안사, 해군, 봉명광업, 체신부, 한국전력, 대한항공이 팀을 육성해 상당히 활성화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한국전력이 가장 강팀이었고…. 체신부는 선수들이 공무원 신분으로 급여가 굉장히 열악했어요. 그래서 봉명광업으로 이적을 했는데 체신부에서 강경하게 반대를 했지요. 체신부하고 경기할 때는 출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적을 했죠. 정말 까마득한 이야기입니다.

- 국가대표로 8년 동안 활약했는데?
▲ 실업 1년차 때인 1966년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처음으로 선발되었습니다. 모두 24명을 선발했는데 김진희 임태호 김성일 최종옥 김영남 박서광 등이 베스트멤버였습니다. 나는 처음에 빠졌다가 종별대회서 좋은 활약을 해 추가 선발이 됐습니다. 이 해 아시안게임에서 이갑금의 대타로 출장한 뒤부터 주전 오른쪽 공격수로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2년 뮌헨 올림픽과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까지 참가하고 대표에서 물러났습니다.

- 1967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도 출전했는데?
▲ 당시 대학팀이 성균관대 한양대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업 선수들이 대학에 입학을 한 뒤 출전했습니다. 엔트리 14명 가운데 12명이 실업 선수였으니 정작 대학선수는 없었다고 보는 게 맞지요. 나는 명지대로 적을 두었고 최종옥 엄세창은 경기대, 조봉현 한원택은 성균관대였습니다.

- 국가대표로 기억나는 일은?
▲ 아시안게임 3번, 유니버시아드 결승전에서 모두 일본에 졌습니다. 그만큼 일본이 강했습니다. 그 뒤 대표 감독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에 2연승 해 설욕은 했는데 그때 중국에 져 또 은메달에 그쳤죠. 아시안게임 은메달만 무려 5개입니다.(웃음)

- 감독으로 데뷔는?
▲ 카타르에서 감독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1980년 조배호 감독과 함께 국가대표 코치로 홍콩서 월드리그를 하는데 카타르에서 감독제의를 하더군요. 지금은 경기 중이고 한국에 돌아가서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이게 먼저 신문기사가 났어요. 그래서 1981년 결혼을 하고 바로 카타르로 갔습니다. 신혼여행까지 겸한 셈이지요. 당시 아랍권에서는 사우디에 황승언, 쿠웨이트에 김영대 표공일, 아랍에미레이트에 이선구 선배 등이 감독을 했고 여기에 코치까지 포함하면 한국인 러시였죠.

- 고려증권에서 감독으로 전성기를 누렸는데?
▲ 카타르에서 5년(대표팀 3년, 클럽팀 2년)을 보내고 돌아왔는데 1986년 고려증권 오관영 상무가 제의를 해 감독을 맡았습니다. 고려증권이 1998년 부도로 해체될 때까지 13년 동안 장윤창 유중탁 김상권 이경석 정의탁 김인욱 이원재 홍해천 이성희 박삼룡 어창선 이재필 등 좋은 선수들을 많이 만난 덕분에 정상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 고려증권의 역대 베스트 6를 꼽는다면?
▲ 어려운 질문이네요. 세터에는 당연히 이경석이고 레프트에는 이재필 박삼룡, 센터에는 류중탁, 라이트에는 장윤창 정의탁, 리베로로 홍해천, 이 가운데 장윤창은 센터로도 가능해 가끔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 국가대표 감독도 2번 했는데?
▲ 198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처음으로 국가대표를 맡았고 그리고 거의 10년 뒤인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감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맡지 않겠다고 해서 떠밀려 맡았고 두 번째는 고려증권이 부도가 난 상황에서 협회의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 대학에서 여자배구도 육성했는데?
▲ 고려증권 감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중대학교(현 동해대학)에서 여자팀을 창단해 감독을 맡았습니다. 8년 동안 전임강사로 수업도 하고…. 조교수까지 올라갔어요. 남자 선수들은 운동에 대한 동기 유발이 있는 반면 여자 선수들은 기계적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화여대 목포과학대 전주 우석대, 단국대 등이 있었는데 거의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죠.

- 프로배구 대한항공 감독으로는?
▲ 초대감독 차주현, 문용관에 이어 3대 감독으로 팀을 맡았는데 성적을 올리지 못해 1년 7개월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팀을 맡으면 선수들을 파악하고 나름대로 팀 컬러를 만드는데 최소 2~3년은 걸리는데 구단에서 성적에 연연해 이를 기다려주지 않아요. 어떤 선수를 스카우트해 어떻게 팀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구상을 해도 너무 기간이 짧아서 제대로 만들어 보지도 못합니다.

- 지금 감독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지금 각 구단들이 성적에 매달려서 기본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외국인 선수들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아요. 이는 필연적으로 한국배구의 추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때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국제대회에서 성적도 올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만의 독특한 배구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 스포츠 가족인데?
▲ 내가 2남 5녀 중 장남인데 동생(진명택)도 키가 큰 덕분에 충북시멘트에서 조금 선수생활을 했는데 자질이 없는지 곧 그만 두었고 여동생(진춘매)도 키가 큰데다 아마 큰 오빠가 배구를 하니까 좋아보였던 모양입니다. 중앙여고를 거쳐 선경에서 국가대표까지 지냈습니다. 그리고 아들(진상원)은 배구는 아니고 KCC 농구단에서 선수생활을 한 뒤 지금은 연세대 농구부 코치로 있습니다. 동생들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들 경기 모습을 보니 애처럽더라구요. 동생과 자식은 조금 마음이 틀린 것 같습니다.

- 끝으로 스파이크에 한 말씀 해 준다면?
▲ 늦게나마 배구전문지가 나오게 돼 배구인으로 고맙죠. 우리나라 배구가 발전하려면 아마 배구가 먼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아마 배구 활성화에 많은 신경을 써 주시면 좋겠고 선후배 배구인들이 자주 소식도 듣고 만날 수 있는 장을 스파이크가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후기
진준택 전 위원장과는 거의 20년 만에 해후를 했다. 잠실 롯데월드 지하에서 만나 근처 국민연금공단 야외에서 사진도 찍은 뒤 커피숍에서 2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면 사정이 많지 않아 다 싣지 못해 아쉽다. 스카우트 비화 등은 나중에 기회에 되면 한꺼번에 연재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친 뒤 선배인 황승언 전 여자 대표팀 감독, 후배인 신춘삼 한양대 감독, 그리고 굳이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전 배구 담당 기자 등과 함께 삼겹살에 막걸리로 캭!!! 지난 옛이야기뿐만 아니라 한국 배구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꽃을 피우다 밤 10시가 훌쩍 넘겨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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