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최근 필자는 본인이 하는 다이어트 강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건강 강의는 즐겁게 듣고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일반 강의와 달리 규제가 부여되는 특성상 무겁고 때론 불편하다. 물론 필자는 즐겁고 유용한 강의를 추구하므로 흥미롭게 강의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이 필자의 강의를 통해 그들이 기대하던 획기적인 다이어트 방법을 찾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거다. 여기서 잠깐 필자의 강의 초창기, 뼈저린 기억을 되살펴 보자. 한 회사의 고객 센터에 근무하는 여성 감정노동자 200여 명이 강의 대상이었다. 다이어트 강의를 통해 날씬한 몸을 만들어 보려는 기대감으로 강의장을 채운 청중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말랑말랑한 지방 덩어리처럼 부드러운 얘기로 편하게 강의를 하겠노라고 청중에게 강의의 서두를 알렸다. 시작은 무난했지만, 문제가 발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강의를 망친 강사가 청중 탓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필자는 그 날 한 청중 덕분에 강의를 망친 것임이 확실하다. 물론 그 여성이 나의 강의를 망칠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맨 앞에 앉은 여성은 한눈에 보기에도 비만한 몸집의 소유자였다. 관심이 있으니 맨 앞자리에 앉았으려니 생각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먼저 사람과 동거를 하던 돼지를 예로 들었는데, 돼지는 인간의 집에 침입한 뱀을 잡아먹었고, 인간은 자신의 똥을 돼지에게 제공하였다, 뭐 이런 얘기다. 이때 조용히 강의를 듣던 그 여성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연이어 수분이 없는 지방의 특성상 벼락에 안전하거나 혈관이 적어 뱀에 물려도 생존율이 높다는 식의 농반진반이 이어지고 청중이 폭소를 터트릴 즈음에 그녀는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누군가를 놀리기도, 놀림을 당하기도 하며 자라왔다. 그녀가 유년기부터 비만을 유지한 채 살아왔다면 많은 놀림을 당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빗대어 말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그녀는 은연 중 자신을 의식했을 것이고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상처가 된 것이다.

강의장에는 울고 있는 그녀와 나뿐이란 착각이 들었고 이내 나도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강의 중에 그녀를 달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강의장 밖으로 쫓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원인이 뭔지도 모른 채 강의는 뒤죽박죽 되었고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강의가 끝난 후 텅 빈 강의실에서 소품들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어디선가 “청중도 아우르지 못하는 네가 무슨 강사냐”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빈 채, 눈물을 닦은 듯한 휴지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 명에 집중한 결과로 199명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은 오랜 기간 필자의 마음에 남았다. 이 일에 대해 타인들은 대부분 햇병아리 강사의 무능함과 상황대처 능력의 부족함을 지적한다. 울던 여성에 대한 지적도 있다.

그럴 거면 다이어트 강의를 왜 들으러 왔느냐는 거다. 혹은 업무 중 받은 스트레스나 헤어진 남자친구 때문에 운 것이 아니냐며 필자를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눈물의 진정한 의미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후로 10여 년이 흐른 지금은 강의 중 특정인을 의식하는 일은 없다. 뒤에서 컵라면을 먹거나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아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내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던 그 여성에 대한 기억은 지우기가 힘들다. 바람이 있다면 그 여성께서 올바른 다이어트를 통한 체중감량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그로 인해 한층 더 밝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셨으면 하는 것이다. 인간의 건강을 논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며 많은 이들이 불안을 조장하여 상업적 이익을 챙긴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눈물을 진심으로 닦아줄 수 있는 강의에 필자는 평생을 바칠 것을 독자들께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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