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홍 청춘칼럼] 통기타 동아리 K양(22세, 주폭)의 취미이자 특기, 그리고 정체성은 '술(酒, Alcohol )'이라는 단어로 완벽하게 설명 가능하다. 일산이 낳은 위대한 주폭 K는 2년 전 혜성처럼 나타나 기존의 음주기록들을 무자비하게 갈아치우며 음주계의 스테판 커리로 급부상하였다. K를 지칭하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는 '인문관 여포', '간 고문 기술자', '걸어다니는 주항아리' 등이 있으며 그녀는 동아리 주폭의 계보, 즉 11학번의 '얼룩말' L, 12학번의 '강한 어깨' O로 이어지는 술깡패들의 대를 잇는 적통 후손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년 동아리 공연 뒤풀이 당시, 홍대 모 술집에서 세 거물이 한 테이블에 모이게 되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는데, 호사가들은 그 압도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삼위일체', '지옥의 문지기 케르베로스', '바알 메피스토 디아블로' 라며 입을 함부로 놀리다가 술을 궤짝으로 마시고 작살이 난 적이 있다. 그 외에도 그들 앞에 멋모르고 앉은 수많은 이들은 모두 인간 장작개비가 되어 요단강을 건넜다. 당신이 만약 저 유명한 ‘알코홀릭 쓰리’와 동시에 눈이 마주친다면, 머지않아 변기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그녀들은 술자리에서 흔히 ‘뺑끼’라고 불리는 거짓된 행위를 매우 싫어하며, 술잔이라는 인위적인 도구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혹여나 그들 앞에서 손기술을 쓴다면, 개인적이고 뼈아픈 경험들을 근거로 당신의 입이 곧 술잔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L, O와는 달리, 주폭 K는 현재 왕성한 주량과 매우 규칙적인 음주빈도로 전성기를 누리는 중이다. 주변 상권 내 술집의 모든 이모들은 그녀의 대모이며, K는 술집에 들어갈 때 이모들과 주먹을 마주치며 묵직하게 인사한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술에 대한 열정과 신념, 그리고 스웩을 엿볼 수 있었다.

참고로 주폭K는 최근 '술먹고 경찰서행'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신환회 당시 만취하여 일산의 네거리에서 고이 잠드사, 경찰이 발견하여 유치장으로 모셨다가 사흘 만에 퇴소하시었다. 소식을 들은 이들은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성대신문에서 취재요청이 쇄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퇴소해 두부를 먹을때 술은 어디있냐고 물어본 일화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리라. 그 후 일각에서는 오원춘 같은 흉악 범죄자들이 다음 생에 K의 간으로 환생해 평생 동안 죗값을 치르며 고통을 받는다는 이론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술기운 가득 찬 들판에도 꽃은 피는가? 3월의 봄바람은 주폭 K양의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먼 옛날, 그녀는 한 성직자 오빠를 남몰래 흠모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K의 주량이 십구 병 반인 것에 비해 그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금욕적이고 독실한 종교인. 그녀는 그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사탄 마귀와 같음을 깨닫고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픈 추억을 지닌 그녀에게 운명적인 봄날의 소갯팅이 다가왔으니.. 우린 그녀가 첫 만남부터 술을 먹는다고 말하자 '아 저 남자는 이제 강을 건넜구나' 하고 못내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얼마 후 오히려 그가 K보다 강한 주량을 가지고 있다는 얘길 전해 듣고는 모두 크게 놀라 그가 혹시 양조장이의 아들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 이후, 싱그러운 봄을 맞이한 K에게는 술냄새 대신 봄내음이 가득했다. 짚신도 제짝이 있듯 모두 자신에게 맞는 짝이 있는 게 하늘의 이치이리라. 나는 드디어 그녀가 술이 아닌 무언가와 교제를 하겠구나 하고 내심 좋아하였다. 어쩌면 그녀가 술을 그득하게 따라줄 기회가 줄어들겠거니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봄이 아니었던가. 유난히 춥던 어느 3월의 밤, 주폭 K양은 그녀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롤도 접고, 사랑도 접었다. 이유는 연락 문제였다. 그녀는 자세히 말하길 꺼렸다. 게다가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K는 학회에서 3연속 꼴찌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고 식음을 전폐했다. 바람이 스산했다. 빙하기가 찾아온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녀의 저력을 믿는다. 아름다왔던 하루살이 사랑은 끝이 났지만 그녀는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술!!!” 이라고 크게 포효하며 종각으로 친구들을 소환하였다. 과연 주폭다운 모습이었다. 나 또한 그녀와 술 한 잔 기울이며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갔다가는 꼼짝없이 혈중 알코올 농도 70%짜리 코알라가 되어 황천길을 기웃거릴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저 멀리서 응원할 뿐이었다.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 모든 것이 그렇듯 이 추운 겨울도 끝나 벚꽃 피는 봄이 오리라. 나는 K가 이 빙하기를 극복하고, 젊고 건실한 양조장이를 만나 불같은 사랑을 할 것을 믿으며 또 기원한다.

어젯밤 거나한 술자리를 마치고 숙취에 몸부림치는 일요일 오후, 나는 나른한 기운에 취해 K와 함께했던 무수한 술자리들을 회상한다. 속이 울렁거렸다. 변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곧 그만두었다.

다만 문득 든 의문은, K의 학회 이름에 '술'이 들어가는 것이 그저 지나친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의 간과 산업혁명 시대 공장노동자 중 어느 쪽이 더 고된 직업인지, 그리고 K를 성당에 데려가면 사제들이 구마의식을 시도할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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