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홍 청춘칼럼] 올해 복학한 동아리 후배 J는 요즘 들어 찬란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녀는 동아리의 자랑스러운 보컬리스트이자, 마을버스정류장 앞 파리X게트의 빵셔틀, 그리고 국문과의 핵인싸이더임과 동시에 같은 동아리 친구들이 넷이나 살고 있는 51-6번지의 막내이다. J는 작고 귀여운(?) 외양에 외할머니가 한국전쟁 당시 입으셨던 꽃무늬바지와 아버지의 작업복으로 추정되는 여벌의 옷들을 즐겨 입으며, 특히 카페 알바를 하다 훔쳐 나온 색 바랜 갈색 앞치마를 사랑한다.

얼마 전 나는 그녀가 스물 셋의 나이로 과 새내기배움터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고, 그녀가 단순한 선배가 아니라 엑스맨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1초 만에 들켜 조롱과 야유를 받으리라 장담했던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는 영화계에 몸담았던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크게 활약해 몇몇 새내기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새터에서 돌아온 이후로 인지부조화 작용인지 맛이 영 간 것인지 J는 종종 자신을 16학번으로 착각하는 것이었다. 한참 얘기하던 도중 16학번들과 밥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자리를 뜨는 그녀의 모습에서 조커 역에 빠져버린 히스 레저의 비극적인 죽음이 떠올랐다.

최근에 있었던 제9 차 가족의 날 모임에서(51-6번지 옥탑에서 열리는 가족의 날은 매달 1, 5, 6, 9, 11, 13, 15, 16, 30일 이다.) 도마 위에 오른 것은 그녀의 방종하고 나태한 생활이었다. 최근 새벽에 편의점에 갈 때면 대문으로 살금살금 들어오는 J와 마주치는 일이 잦았기에 나는 즉시 가족의 날 모임에서 이를 고자질했고, 김 형이 인도에서 훔쳐온 보드카를 마시며 우리는 그녀를 호되게 추궁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 제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를 빵셔틀이라 놀리며 업신여기곤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J는 빵셔틀이 아니라 요즘 핫한 '다X토리' 라는 술집의 VVIP였으며, 남다른 댄스 실력과 특유의 매력으로 신촌의 남심(男心)을 휘어잡고 있었다. 아시모를 연상케 하는 그녀의 로봇-댄스 실력에 반해 치기어린 남성들이 줄곧 그녀에게 합석을 제의했지만 합석왕의 눈은 높았다. 그녀는 한 달 쯤 전 그녀에게 '혹시 카톡이 존재하니?'라는 멘트로 접근해온 남성이 있었으며 듣자마자 지체 없이 뺨을 때렸다고 말해주었다. 충격적이었다. 우리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J의 방탕함과 나태함에 대해 수차례 고성이 오간 후 51-6번지의 맏형인 27세 김 형은 아주 크게 혼이 나 봐야 한다며 종아리 걷어! 하고 호통을 쳤다. 예의에 밝은 그가 엄격한 목소리로 회초리로 쓸 나뭇가지를 꺾어 오라는 것을 가까스로 말릴 수 있었다. 나는 J의 정수리에 꽂아둘 위치 추적 장치 공동구매를 추진했다. 인천 소재 공장에서 염전노예마냥 혹사당하다 가까스로 복학한 K는 앞으로 오전 11시가 통금이므로 어디 나돌아다닐 생각 말라며 엄중히 경고했다. 술에 얼근히 취해 탁한 눈으로 그의 머리숱을 쳐다보던 J는 그가 다른 곳을 쳐다보는 동안 몰래 그의 정수리에 침을 뱉었다. 살가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신촌에서 치명적인 매력을 뽐내는 합석왕 J였지만, 51-6번지 안에서 그녀는 감정 쓰레기통의 역할을 맡고 있다. 가족의 날이 되면 김 형은 자소서로 인한 스트레스를, 염전노예 K는 모발 이탈-즉 탈모로 인한 분노와 공격성을 J에게 쏟아 부었다. 나는 요즈음 들어서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없으나 보고 있자면 퍽 재미가 있어 동참하는 편이다. 우리는 종종 그녀의 유난히 붉은 정수리를 손날로 공격하거나, 널어놓은 빨래를 의류함에 넣는다거나, 몰래 그녀의 빨래에 침을 뱉곤 한다. 그렇지만 오해는 삼가 주었으면 한다. 이는 모두 애정의 발로일 뿐이요, 우리가 그녀를 아낀다는 징표다. 누가 뭐래도 J는 우리 51-6번지의 소중한 막내인 것이다.

가령 우리는 J가 남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크게 노하여 당장 옥탑으로 데려오라고 역정을 낸다. 그녀가 혹여나 못된 남자를 만나 마음고생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J와 교제하고 싶다면 '옥탑의 시련'이라 불리는 열두 가지 과업들을 통과해야만 할 것이다. 이는 J의 남자친구가 되기 위한 자질을 평가하는 절차로, 그 중에는 '옥탑에서 뛰어내려 살아남기', '경찰서에서 곤봉 훔쳐오기' ,'절대반지 파괴하기' 와 같은 시험들이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아직 도전자는 0명이다.

우리가 이렇게 J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을 그녀가 알지 모르겠다. 제13 차 가족의 날, 모두들 예쁜 신입생 한 트럭이 와도 J와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J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감동해 눈물을 훔쳤다. 다음날, 술에서 깬 염전노예 K와 김 형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들은 기회만 된다면 J를 예쁜 여자의 핸드폰 번호와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J의 꿈은 영화계를 주름잡는 큰 손이 되어 유아인, 윤두준과 결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를 위해 돈을 모아 빔-프로젝터를 하나 장만했다. 그녀가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보며 꿈을 키워나가리라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이었다.

J에 대한 회상을 마치고 나는 수업을 위해 방을 나섰다. 그냥 갈까 하다가 세 걸음 왼쪽으로 움직여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다모토리에 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열심히 마른안주에 소맥을 마시며 전장을 누비고 있으리라.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건승을 기원했다.

교정에 내리쬐는 4월의 햇살이 새파랗다. 만개한 벚꽃이 머금은 향기가 올해도 무사히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 했다. 다만 문득 든 궁금증은, 다모토리가 오후 네 시부터 영업을 하는지, 그리고 유아인과 윤두준은 과연 옥탑의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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