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정의 생활 속 페미니즘]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논의 중 하나는 “여혐”과 “남혐”의 대립이다. 소위 말하는 “남초”사이트들과 “여초”사이트들의 논쟁과 싸움은 현재 대한민국의 실태가 어떤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중 하나다. 지역감정, 세대차이로 인한 갈등, 정치이념에 의한 대립 등과 같이 남녀 사이에서도 혐오와 대립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여혐과 남혐은 다른 ‘성’을 혐오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 “약자”인지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 혐오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자에 대한 일방적 혐오와, 강자에게 대항하는 혐오를 동일 선상에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학교폭력의 가해자의 폭력과 가해자에게서 자신을 방어하기위해 폭력을 택한 피해자는 수단이 폭력이지만 그 과정과 방법은 전혀 다르다.

여혐은 약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다. 일부 남성들이 여혐을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군대다. 그들은 자신을 군대에 보낸 국방부와 자신들에게 가혹한 군 생활을 강요한 선임들을 비난하지 않고 자신들 보다 약자인 “여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이는 여성들이 그들보다 약자이기 때문이다. 약자를 혐오하고 핍박하는 건 강자를 비난하는 것 보다 훨씬 쉽고 간단한 일이다.

남자들이 말하는 “역차별”의 상징인 “여자대학교”는 교육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외국 선교사들이 만들어준 학교였다. 여대를 제외한 모든 대학엔 남자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대학들을 그들은 차별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의 성비가 여성들이 더 많은 것도 성차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들이 다 남자인 것은 지적하지 않는다. 대기업 간부가 다 남자인 것도 정치인 대부분이 남성인 것도 지적하지 않는다. 그저 약자들을 비난한 수단을 찾을 뿐이다.

이해 반해 남혐은 강자에 대한 저항의 혐오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1년에 약 2만건의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다. 수치화하면 약 30분에 1명의 여성이 성폭행 당하고 있다는 통계결과가 나온다. 불법 몰래카메라 사이트인 <소라넷>이 없어진지 불과 1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회원 수는 100만 명이 넘었고 사이트는 1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열려있었다. 5000만 국민이 살아가는 나라에서 100만 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들은 “남혐”이 “여혐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최후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소라넷이 사라진지 겨우 1달이 지났고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에게 핍박당하는 약자의 입장에 있다. 그들이 하는 “남혐”은 “생존권을 찾기 위한 방어적 혐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 “중립”을 지지 하는 사람들은 “혐오에 혐오로 대항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이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것 또한 치명적인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강자의 혐오와 그에 대항하는 혐오는 결코 동일선상에 둘 수 없다. 현재 20-30대 여성들은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낙태가 가장 많이 일어났던 시대에서 살아왔다. 그녀들은 가장 많은 폭력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지금도 3일에 1명의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하고 있다.

“남성혐오”는 약자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마지막으로 택한 생존 수단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의 혐오는 자신들보다 약자가 아닌 강자를 향해있다. 자신의 약함에 대한 분노를 타인에게 떠넘기는 남혐과 자신을 핍박하는 강자들에 대한 생존을 보장하기위해 생긴 여혐을 중립에 시선에서 보고 있는 것 이야말로 그들에 대한 기만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라에서 여성들은 약자다. 아마 남녀가 진정한 의미로 평등해지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자신보다 약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잡는 올바르지 못한 감정소모적인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남혐vs여혐의 대립 구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성숙한 사고를 지녀서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