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바이올리니스트 김광훈의 클래식 세상만사]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컬럼이 ‘클래식과 연관된’ 혹은 ‘예술 세계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성격을 띠고 있어, 매너리즘에 대한 언급 또한 응당, ‘클래식의 매너리즘’에 대해 이야기해야 맞겠지만, 실은 이 매너리즘은 비단 음악뿐 아니라 우리네 삶의 곳곳에 침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느슨해진 긴장감, 혹은 관계에의 싫증을 매너리즘으로 연결시켜도 하등 무리가 없을 것이며, 똑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혹은 딱히 창조성을 발휘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에 매번 단순 반복을 해야 하는 일의 현장 또한 매너리즘에 다름 아니다.

이 동선(動線)을 조금 더 확장하면, 직장인이 매일 고민하게 되는, 몇 안 되는, 회사 근처 식당들의 점심 메뉴 선택 또한 매너리즘의 변주(變奏)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식사 후 당연하다는 듯 손에 쥐어드는 아메리카노 한 잔 또한 매너리즘의 사정권(?)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매너리즘은 창조성과 신선함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예술의 분야에서는 더욱 위험한 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연주를 더 이상 마음으로 연주하지 못하여 설득력을 잃는다면, 청중들은 이를 수이 알아차릴 것이다. 아니, 설혹 알아차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연주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클래식 음악에서 연주자는, 설계자인 작곡가를, 소비자인 청중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매개자이다. 클래식 음악이 결국 딱딱하고 엄격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실은, 이러한 좁은 운신(運身)의 폭, 그러니까 연주자의 개성보다는 작곡가의 의도, 혹은 영향력이 언제나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고, 언제나 이러한 작곡가의 의도를 십분 잘 전달하는 연주자가 좋은 연주자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에서 오는 문제 아닌 문제에서 기인한다.

각설하고, 연주자 또한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라, 같은 곡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지겨워질 수밖에 없다. 가수 김흥국이 그의 히트곡, ‘호랑나비’를 족히 수천 번은 더 불렀을 텐데, 그것이 매번 신선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혹하기까지 한 일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데, 클래식 공연의 전달자인 연주자는, 비록 그 곡을 수백 번 연주했더라 하더라도, 대다수의 청중(일부 콘서트 고어들을 제외하면)들은 그 ‘음악적 경험’이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수백 번을 연주했더라도 언제나 신선함을 유지하여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무대 위 연주자들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다.

“여보게, 이 곡을 100번 연주하더라도 늘 신선한 감각을 잃어서는 안 되네.”

일찍이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Maxim Vengerov)와 함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며 벤게로프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연주를 더할수록 깊이가 깊어질 수도 있겠지만, 따라오는 매너리즘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때문에 연주자의 숙명(宿命)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곡을 연습해 본다거나, 음악 이외의 다른 것에서 여유를 찾는다거나, 아니면 마주해야 하는 작품의 새로운 해석을 위해 애쓰거나 하는, 여러 ‘현실적인’ 방법으로 매너리즘의 극복을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나, 궁극적으로 매너리즘은 마음의 병.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혹은 매너리즘을 마주하지 않게 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는지.

▲ 바이올리니스트 김광훈 교수

[김광훈 교수]
독일 뮌헨 국립 음대 디플롬(Diplom) 졸업
독일 마인츠 국립 음대 연주학 박사 졸업
경기도립 오케스트라 객원 악장
유라시안 필하모닉 객원 악장
서울대학교 전공자 실기과정 강의
현) 가천대, 숭실대 교수(강의)
스트링 & 보우. 스트라드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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