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수인의 인인지론(人仁持論)] 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배치 문제로 국내가 떠들썩 했다. 특히 배치 대상 지역인 성주군에서는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다. 군민들의 설득을 위해 국무총리가 나서서 입장을 표명했지만 돌아온 것은 달걀과 물병 세례였다. 국가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당하는 군민의 억울한 심정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나라를 대표하여 온 국무총리에게 잠시의 통보도 없이 무력으로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은 올바를 처사가 아니었다. 입장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헤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뿐 아니라, 개, 돼지 발언으로 자리를 반납했던 교육부 고위 간부의 일도, 자신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도의원에게 ‘개, 쓰레기’ 라고 말한 경남의 도지사의 일도, 모두 마땅히 보여야 할 인품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두려운 것은 이런 물의들을 보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남의 잘못을 비난하듯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앞선 사건들의 근본적 원인은 단순히 특정 지역이나 인물에 한정 지을 것이 아닌, 한국에서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의 소치라고 보아야 한다. 그 중 옛날에 비해 오늘 날 가장 결여된 요소는 바로 예禮의 상실이라 본다.

꼰대 문화, 대학 군기, 갑질 논란 등 현 세대에 등장한 이런 신조어들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남을 존중하지 못하는 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특히나 앞서 말한 신조어들은 ‘상하 복종 문화’라는 왜곡된 유교 문화에서 비롯되었는데, 문제는 이런 악습이 ‘문화’라는 명분을 짊어지고는 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물려지고 있는 씁쓸한 실정이다. 본디 유교가 추구하던 덕목인 오상五常의 예禮를 잃어버린 채 의범절儀凡節 만을 요구하는 세대들이 만연하니, 자라나는 세대들의 앞길은 막막하기만 하다.

유교의 핵심 인물인 공자는 인仁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을 회복한다고 여겼다. 그의 저서 [논어]에서는 예禮란 자신을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것이며, 나의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통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따라서 예를 잃은 세대들의 사회는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으며, 올바르게 돌아가기는커녕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다. 특히나 유교적 질서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예禮의 상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위기인 셈이다.

예禮의 회복은 현 세대들이 가져야 할 불가피한 덕목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인 예禮인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인사를 한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에 순종한다’ 와 같이 법도처럼 정해진 질서는 예禮가 될 수 없다. 예禮는 남을 자신처럼 여기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의 선조들에게 찾아 볼 수 있다.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 선생은 한참 어리고 지위도 낮은 후배인 기대승奇大升이 자신의 이론에 문제점을 지적하자 이를 수용하고 13년에 걸쳐서 서로 논쟁을 벌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논변이라 불리는 이 일은 단순히 이론적 가치의 우월성뿐만 아니라, 논쟁의 과정 중 서로에 대한 호칭이나 문체 등 존중의 방식이 남달랐기에 유명하다. 세종 실록에서도 예에 대해서 찾아 볼 수 있다. 세종이 부왕인 태종의 실록의 편찬을 마치자, 그 기록을 보고 싶어 하여 태종실록을 검수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하들은 세종의 행동이 후대 왕의 본보기가 되지 않을뿐더러 앞으로의 실록 편찬에 문제가 된다고 주장하였고, 세종은 왕으로서 그들의 주장을 존중하여 뜻을 거두었다고 한다.

예禮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예禮는 일방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보여야 하는 예禮가 있듯이 어른이 어린이에게 보여야 할 예禮가 있고, 후배가 선배한테 보여야 할 예禮가 있듯이 선배가 후배한테 보여야 할 예禮가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처럼 예禮도 오고 가야 진정한 뜻을 이룰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성은 예禮는 아래로 흐른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세종의 행동은 후대 왕에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조선의 왕들은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처럼 되는 것이 목표였으며, 세종의 보여준 예禮는 후대 왕들이 가져야할 왕으로서의 자질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왜곡된 문화들은 다른 복잡한 해결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 세대가 먼저 예禮를 보여주어야, 자라나는 세대들이 보고 배움으로써 자연스레 해결 될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다음 세대이지만, 현 세대들의 준비는 필수적이다. 언젠가 한국이 진정으로 예의지국으로 불릴 수 있도록, 우리, 그리고 나와 너는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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