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얼마 전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나온 대화 중 일부다. 암에 걸린 사람이 주위에 널렸다고 누군가 얘기하자 듣던 이 중 한 사람이 즉시 그 말을 받는다. “너무 오래 살아서 그래.” 맞는 말이다. 고령화와 각종 질병의 상관관계를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정의했다. 물론 오래 산다고 모두 암에 걸리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의학에서 말하는 질병의 발병 요소에 노화는 배제되는 법이 없다. 인간의 수명이 4, 50에 불과했던 시기에 겪을 수 없던 각종 질병을 백 세 시대의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외에도 정기 검진의 증가와 진단기기의 발달 및 보급 역시 암 환자의 양산에 한몫했다면 그것 역시 맞는 말이다.

얼마 전 하느냐 마느냐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갑상샘암의 예를 들어보자. 통계를 보면 대한민국은 2008년 이후 인구비례하여 감상샘 암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나라다. 실제로 한국인에게 많을까? 인구적, 유전적, 신체적으로 한국인이 갑상샘 암에 취약하다는 요인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찾다 보니 많아진 것으로 보는 게 맞다. 국가별 일정한 모집단을 구성해 검사했음에도 한국인이 많았다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과 달리 외국은 일반검진에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는 갑상샘암의 성장 속도가 더디고, 그에 따라 환자의 생존율이 높기 때문이다.

번거로운 검사의 시행과 발견 초기의 수술 등 초동조치가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지 못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는 추세다. 환자는 양산되는데 사망자 수는 10년째 변화 없음이 결정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고령화 사회 진입으로 겪을 수 있는 질병인 암에 맞서는 의학의 발전 속도는 몹시 더디다. 한국인 사망원인 1순위를 고수하고 있는 막강한 위력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한국인 셋 중 한 명은 암으로 사망한다는 이 참담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하나. 그 순위에서 암을 끌어내리지 못하는 현대 의학이 과연 도움되기는 하는 걸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냥 내버려둬도 별문제 없는 것을 기필코 찾아내 수술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유교적 도덕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외국의 경우엔 자연사한 고령자를 유족의 동의하에 부검하기도 한다. 암에 걸렸다 스스로 치유된 많은 흔적이 그들의 몸에 남아있다고 한다. 필자의 가슴 속엔 암에 걸린 후 최선을 다해 병원 치료를 받다 세상을 떠난 많은 지인이 아직도 남아있다. 누군들 생각만 해도 무섭고 고통스러운 암을 자기 일이라고 믿겠나.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암이 남의 일인 양 살던 그들이다. 암에 걸린 가족을 떠나보내고 남은 이들 역시 정신적, 경제적 이중고에 시달린다. 장기간 치료에 따른 막대한 병원 및 요양비 등을 감당해낸 결과이다. 환자는 삶의 질이 저하된 상태에서 병원 치료를 받으며 3년, 혹은 5년을 버티는데 현대 의학은 암을 극복하지 못한 채 생존율을 높이는 숫자 놀이에만 급급하다. 조기발견으로 일찍 발견해 냈으니 사망까지의 기간이 길어졌을 뿐인데 현대 의학은 생존율을 높였다며 자랑한다.

치료받지 않으면 그만큼도 못 산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으며, 병원치료를 거부한 채 죽어간 암 환자도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암을 방치한 채 소중한 생명을 그냥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의 마지막 생존전략, 소위 히든 카드가 어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우리 모두 해보자는 거다. 암이란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인 교통사고나 심근경색처럼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다. 상업적 내용이 아닌, 좋은 책 몇 권이라도 읽으며 우리 몸과 암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조차 우리에게 없을까. 항암, 수술, 방사선 등 한번 맡기면 돌이킬 수 없는 현대 의학에 우리의 몸을 덜컥 맡기는 현실, 그리고 암을 마냥 공포로 인식하는 우리가 안타까워 하는 소리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