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주동일 청춘칼럼]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에서 돌아오면 서점이 문 닫기까지 삼십분 남았다. 다급하게 책상에 널브러진 동전을 긁어모아 서점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당시에 좋아했던 힙합 음악에 대한 글을 읽으려면 외국의 힙합 잡지 ‘XXL’을 사는 방법밖에 없었다. ‘XXL’과 형이 읽고 싶다던 'GQ'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잡지는 묵직하면서도 가벼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GQ'무겁고 그에 비해 두께가 반밖에 되지 않던 ‘XXL’는 가벼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문화의 전문가인 에디터들의 글에 대한 존경은 무거웠고, 그걸 손에 얻은 설렘이 날아갈 듯 가벼웠던 것 같다.

정치·사회 등 흔히 ‘무겁다’고 평가되는 주제들과 거리가 먼 가벼운 이야기들,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상업적 태도, 읽기 쉬운 구어체와 가끔 과도하게 멋을 부린 문장들까지. 잡지는 다른 지면 매체들에 비해 가볍다는 평가를 자주 받는다. 사실 잡지에 대한 평가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묘하면서도 결정적인 오해가 있다면, 잡지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가벼워졌고 그를 위해 수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왔다. 잡지는 17세기, 프랑스의 한 출판업자가 신간을 소개하기 위한 카탈로그를 발행한 데서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시간이 지나 카탈로그들은 독립된 정기간행물이 되었고 오락적 요소 등을 더해 특정 주제를 가지고 발행되기 시작했다.

카탈로그에서 시작되다보니 광고 특유의 시각적 이미지와 오락적 성격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고, 해당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긴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신문보다 재미있고 자세할 뿐만 아니라 책보다 유행에 빠르고 시의성이 좋은 글, 도록 못지않은 화려한 이미지와 카탈로그의 레이아웃을 이용한 높은 시각성이 잡지의 특징이었다. 특히 글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레이아웃 연구와, 자신들의 비전과 주제를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화보를 통해 잡지는 다른 매체들보다 대중들에게 시각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디터들은 자신들의 일을 글쟁이보다는 프로듀서에 가깝다고 말하고, 작문 못지않게 레이아웃 제작에 힘을 쓴다.

잡지의 이러한 매체적 특징은 ‘한겨레’의 한 기자가 주간지 ‘한겨레21’에서 파견근무를 할 때 “자신들이 관심 있는 분야를 깊게 보도할 수 있어서 많은 기자들이 재미있어 해요.”라고 사석에서 말한 바와, 현재 1인 미디어 운영자이자 과거 시사저널 탐사보도 팀장이었던 정락인 기자가 우리나라에 처음 시사주간지가 들어왔던 순간을 두고 “어떤 주제를 길게 풀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가능성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한 점에서도 볼 수 있다.(2016년 1월 4일, ‘문화전문기자양성을 위한 기자아카데미’에서)

최근에는 여성을 위한 성인 잡지 ‘젖은 잡지’나 플러스 사이즈 모델 전문 잡지 ‘66100’, 20대의 일상을 인터뷰로 풀어낸 ‘디아티스트매거진’ 등 다양한 주제와 가치관을 다루는 잡지들이 등장하고 있다. 잡지가 가벼워진다는 평을 받는 데에는 매체 자체의 특징뿐만 아니라 오랜 사양화로 인한 극복 노력들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영상 매체와 온라인 매체들이 보급되며 잡지는 최근 광고비에 많은 의존을 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국내 성인잡지 ‘스파크’의 성인용품 전문점, 과거 ‘크래커 유어 워드로브’의 샵, 고아웃 코리아의 ‘고아웃 스토어’ 등 많은 잡지들이 자체적인 수익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잡지는 거래처와 광고주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해당 문화를 비판하는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리며 모체였던 카탈로그처럼 변해갔다.

하지만 끝날 것처럼 보이는 잡지의 이러한 흐름에도, 잡지의 오랜 팬으로서 희망을 갖는 것은 돈이 아닌 콘텐츠를 향한 변함없는 열정과 ‘살기 위해서는 광고 수가 아닌 질을 높여야 한다.’는 잡지사 직원들의 믿음이다. “물론 광고가 많이 들어와서 회사가 돈이 많아지면 좋죠.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은 콘텐츠를 만드는 거잖아요. 그리고 잡지의 질이 좋아지면 광고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법이고요.” (2015년 6월, 잡지사 ‘M’의 출판 담당 매니저와의 개인 인터뷰에서)

"난 기자나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사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만든 잡지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선 사업가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Virgin’ 그룹 회장 Richard Branson (올해 4월 한 남성지 출판인의 SNS에 올라온 글귀) 날이 갈수록 좁아지는 산업 규모, 잇따른 폐간 등으로 잡지의 미래는 현재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대중들이 텍스트와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요즘, ‘대중들에게 읽히는 글’을 위해 가벼워지려는 잡지의 오랜 노력은 단순히 가볍다고만 평가하기에 사뭇 진지하고 무겁지 않았을까.

장 마르크 파리지스의 소설 ‘종이 한 장 위의 연인들’에는 “그것의 추락은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 때문이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잡지들은 가벼워지기 위한 노력이 무겁기에 추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무거운 노력들이 언젠가는 점점 벌어져가는 텍스트와 대중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하나의 가능성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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