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작은 콩알만 한 알약을 매일 아침 한 알씩 먹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내가 고혈압 환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증상도 없는데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가며(아예 달력에 약 봉투를 주렁주렁 붙인 이들도 있다.)약을 먹는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기존의 잘못된 생활습관을 싹 바꾸면 어떻게 될까. 식습관 등 잘못된 행위를 뜯어고치는 것이 약의 효과에 견줄 바 못 되는 것일까. 약은 그나마 우리에게 남아있는 개과천선 의지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만다.

한 달에 한 번씩 의사를 만나 처방전을 받고 약을 탄다. 그날 저녁에 이어지는 질탕한 술자리. 술에 덜 깬 채 아침에 일어나 내가 왜 이럴까 자책하지만 잠시뿐, 땅거미가 깔리면 또다시 어제 저녁의 반복이다.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순 없나. 당시 44살의 필자는 내게 혈압약을 권유한 의사에게 역제안했다. “술을 끊고 체중을 줄여보는 것은 어떨까요?” 80kg을 넘나드는 체중과 술을 즐기는 습관이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는 내 제안이 마뜩잖은 표정을 짓는다. 묵묵히 고개를 저은 의사가 딱하다는 듯 필자에게 들려준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약을 거부한 채 집으로 돌아간 고혈압 환자가 형광등을 갈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섰는데 그 순간 혈압이 올라 뒤로 쓰러져 죽었다는 것이다. 의사가 이 끔찍한 얘기를 생활습관 개선을 통해 증상을 개선해 보겠다는 예비 환자에게 들려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기 위함인지, 또는 환자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잘못을 뉘우치는 자식에게 기꺼이 기회를 주는 부모의 마음과 의사의 마음은 확연히 다르다.

2000년대에 들어서 당뇨, 고혈압 등으로 대표되는 성인병이 청소년 시기로 확대되는 경향이 두드러지자 이를 생활습관병으로 개칭해 부르도록 한 단체는 다름 아닌 대한내과협회다. 그렇다면 의사 또는 병, 의원들은 단순히 약을 권유할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생활습관을 개선하여 질환을 관리하도록 계몽할 의무나 책임을 갖는 사람들, 또는 단체가 아니겠는가.

의사는 바쁘고 병원은 늘 분주하다. 그 날도 오래 기다린 후 의사를 만났고 내 뒤에는 역시 많은 사람이 의사를 만나기 위해 줄 서 있다. 의사의 표정에서 내가 조속한 결정을 내리고 진료실을 나갔으면 하는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순간 절간에 와서 성경을 달라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것은 나의 결정뿐이다.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는 고혈압 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형광등을 갈기 위해 집으로 갈 것인가. 필자는 집으로 가기로 했다. 형광등을 갈다 죽든, 백열등을 갈다 죽든, 멀쩡한 몸으로 고혈압 환자의 꼬리표를 단 채 정기적으로 의사 앞에 불려 오긴 싫었다.

자신의 의지로 혈압을 정상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일종의 오기였다. 일단 병원문을 들어서면 병원의 방침과 의사의 지시에 순순히 따라야 한다. 의사 앞에 앉은 채 건강을 담보로 무모한 도박을 하기란 쉽지 않지만, 약에 의존한 채 자신의 의지와 반하여 살아가긴 더더욱 싫었다. 치료를 거부하니 다른 검사를 받거나 처방전을 받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병원 문을 신속히 나갈 수 있고 비용도 덜 들어 좋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세컨드 오피니언을 듣기 위해 몇 군데 병원을 전전했지만, 대다수 의사의 반응은 비슷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그저 약 드세요 뿐이다. 시간과 병원비만 날린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고, 지친 필자는 더는 병원을 찾지 않기로 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필자는 본태성 고혈압 판정을 받은 날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과연 약을 먹지 않고도 형광등을 제대로 갈며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지닌 채 말이다. 다음 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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