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수인의 인인지론(人仁持論)] ‘서울 가면 눈뜨고도 코 베어 간다’는 옛말이 있다. 서울 사람들의 인정 없음을 재치 있게 표현한 말이다. 이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옛 사람들에게 정情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정이 없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사람을 의미했다. 그들이 오늘의 한국을 본다면 ‘코뿐만 아니라 눈과 귀도 뽑아갈 세상’이라 한탄할지 모른다. 본디 정情은 사람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지만, 시국이 각종 비리와 부조리로 얼룩져 있고, 여기저기서 탄핵의 소리와 온갖 잘잘못을 가리는 일로 혼란 속에 있는 한국에서 무엇을 감히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한국은 9월 28일에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 ‘김영란 법’을 시행했다. 이 법에 대한 많은 논점을 가지고 이슈가 되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고 가는 정이 김영란 법에 의해 제한된다는 부정적 입장이 있는 반면, 해당 법을 통해 그간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 박혀있는 음성적인 청탁 문화와 촌지 문화를 뽑아 버리자는 입장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각 주장이 사회적 입지에 따라 편이 나뉜다고 말했다. 전자는 주로 고위 공직자들이나 언론인들, 즉 법이 시행되었을 때, 직접적 영향을 받을 사람들이었고, 후자는 법이 시행되어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서민들이었다며, 다수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김영란 법이 단순히 서민의 유익을 보장하기 위험이었는지, 아니면 부패된 한국사회를 올바르게 정화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는지 세심히 고려해보아야 한다.

김영란 법이 과연 한국 사회의 정을 제한하는가?
김영란 법으로 인해 공직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들이 대폭 줄었을 것이다. 뇌물 수수나 청탁의 의도가 아닌 선물 마저 법에 규제를 받았다며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기사에서는 김영란 법이 시행됨으로, 명절 선물 등의 소비 감소가 서민 경제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이 주장들이 한국 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정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 지 보여준다. 질병처럼 번져진 음성적인 뇌물 문화가 서민들의 경제에 영향을 끼칠 정도라면 한국의 부패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물론 근거 없는 추측이었고, 미미한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옛 선인들이 말하던 정情은 공동체 적 유대감을 중시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의 정情에는 이理가 있었고, 정리情理에 합치 된 삶을 사는 것을 합리적인 삶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선인들의 정情은 도리에 근본을 두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정情은 이理는 커녕 실리實利을 위한 정情이 되었고,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을 요구하는 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영화 [부당 거래]의 대사는 이와 같이 우리 내 왜곡된 정을 잘 표현하였다.

김영란 법이 시행되고 한달이 조금 넘은 얼마 전, 학교에서 재미있는 글을 보았다. 한 학생이 ‘빼빼로 데이 날에 교수님께 빼빼로를 선물로 드려도 되나요?’라고 학교 대나무 숲(익명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어찌 보면 우스운 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슬프기도 하다. 학생의 행위가 순수한 목적의 행위가 보는 사람에 따라 더럽혀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가 이 글을 보고 빼빼로를 주어도 되냐 아니냐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은 웃긴 일이다. 오히려, 이런 고민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우리를 부끄러워해야 하며, 잃었던 정情의 회복을 촉구해야한다.

김영란 법은 언젠간 폐지되어야 한다.
김영란 법의 시행은 한국의 부패 지수가 최악 수준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법의 시행은 부패로 얼룩진 사람 간의 문화를 회복하는 데에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삶에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 단순히 감사에 표시로 준 선물이 오해를 받을 수도, 명절 선물을 받지 못해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영란 법은 그동안 사회가 그리고 개인이 외면해 온 왜곡된 정의 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결과물이다. 우리의 양심이 제대로 역할을 해오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양심이 해야 할 일을 법에 맡겨 제한시킨다는 사실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수치스런 일인가? 깊게 박힌 썩을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나는 김영란 법이 언젠가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언제까지나 법이 우리의 양심을 판단하도록 놔둘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는 김영란 법의 존재를 수치의 상징으로 여기고 사회가 공공연하게 암묵 했던 부패를 되돌아 봐야 한다. 그리고 물론 잃어버렸던 情을 다시 찾아 와야 한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한국 사회가 잃었던 것을 되찾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언젠가 우리가 김영란 법을 폐지하는 날이 오도록, 더 이상 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썩어 버린 뿌리들을 계속 뽑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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