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식탁 위의 작은 변화를 일으켜라. 육류를 피하고 식물성 음식을 많이 섭취하라. 채식을 선택하는 순간 당신은 앞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글이 실려서 어린이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거나 육류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심어준다면 올바른 일인가. 한 술 더 떠 방목장 건설을 위해 열대 우림을 파괴하고 너무 많은 방목으로 인하여 목초지가 사막화 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채식으로 모든 생명이 존중 받는 건강한 사회를 꿈꿀 수 있다' 라는 대목에 이르면 기가 찰 뿐이다. 초등학교 6학년 읽기 교과서에 실린 내용들이라 한다. 이 가르침을 받은 초등학생들은 점심 급식에 돼지고기 한 점 없이 풀 반찬만 먹은채 아리수만 한 사발 들이켜야 한다. 배움의 실천과 언행의 일치를 위해서 학생, 교사 모두 그렇게 했어야 옳다.

그렇다면 농사를 짓기 위해 비료를 쓰고 비행기로 농약이나 제초제를 뿌려대는 행위는 사랑인가. 논, 밭을 만들기 위해 산림을 파괴하거나 불을 질러서 그 땅위의 수많은 생명들을 해하는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인간은 새알을 하나 주워 먹어도 살생을 한 것이요, 밥 한 공기를 먹어도 4,000개의 생명을 해 한 행위가 된다. 찐 계란을 먹고 풀을 밟고 서서 사과를 따먹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간지럽혀 웃겨 죽이지 않는 한 동물의 도축에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불쌍한 동물을 비참하게 사육한 후 때려서 잡아먹었다면 잘못된 그 방식을 바꿀 일이지, 그것이 육식을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논리가 증폭되는 것은 심각한 자가당착이다.

어차피 생명을 해 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동물을 음식으로 취하거나 식물을 뿌리채 뽑아서 먹는 일이나 같은 맥락의 행위이다. 물과 공기만 제외한다면 인간이 자연에서 먹는 모든 것이 생명을 해하는 행위이다.

토끼를 무자비하게 잡아먹는 호랑이를 우리가 비난하지 않듯이 인간 또한 동,식물을 해 하여 살아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삶의 방식이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순 없다는 거다.

채식이 인간의 신체구조에 적합하며 동시에 건강에 이롭다는 논리 또한 근거가 희박한 극단적이고 자기중심적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 과거로 돌아가 보자.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먹은 탓에 인간은 잡식동물이란 호칭을 얻었다. 굶거나 닥치는 대로 먹다보니 더러 죽기도 하고 운 좋게 살아남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다.

인간과 동거를 결심하고 주인이 주는 대로 받아먹던 개도 어쩔 수 없이 잡식동물의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본능은 감추기 어려운 법이다. 먹다흘린 밥보다 뜯다 남은 갈비를 던져줄 때 개는 더 좋아라 꼬리를 흔든다.

마이클 폴란은 “잡식동물 분투기”라는 책을 통해 무엇이던 잘 먹고 씩씩하게 생존해 나가는 인간의 삶을 잘 표현했다.

인간은 바다와 육지와 하늘에서 고군분투하며 먹을 것을 구해왔다. 배와 비행기와 자동차만 빼고 모두 먹는다고 하지 않는가. 분투라는 표현은 닥치는 대로 집어먹기 보다는 그 속에서 먹을 것들을 골라내야 했다는 얘기다. 자연이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애기처럼 인간에게 모든 것을 그냥 베풀어 주지 않았단 의미다.

인간 역시 목적성 없는 많은 생물들이 그랬듯이 살기 위해 그냥 살아왔을 뿐이다. 자연도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 원칙이 없으니 관용도 없다. 예측도 불가능해서 바닷물을 먹고 자라는 대부분의 식물은 식용이 가능한데 육상의 버섯 중 절반은 독버섯이다.

원시인류 중 누군가가 독성이 있는 열매에 혼줄이 난 결과로 우리는 지금 안전한 과일을 먹을수 있게 된 것이다. 복어의 독을 피해나가는 방법 등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생선을 먹는 법을 인류가 익혀왔기 때문에 부드러운 단백질인 생선살을 우리가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군의 음식을 굳이 기피할 이유가 없다. 인간은 뭐든지 먹을수 있는 잡식동물이다. 다만 먹는 음식의 양과 질은 심사숙고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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