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수인 청춘칼럼]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건강의 이유도 있지만 특유의 쓴맛을 싫어한다. 그렇다고 술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술에는 미학이 있다. 한국의 오랜 역사에는 술에 관한 2가지 예의가 있다. 첫째는 향음주례(鄕飮酒禮), 술을 마실 때 예절을 지키는 것이다. 둘째는 군음(群飮)문화, 여럿이서 마시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술은 ‘오고 가는 술잔 속에 싹트는 情’ 이라는 말이 있듯이 단순히 도취의 목적이 아니라 결속을 다지기 위해 마신다. 제사의 술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고, 친구와의 술은 오랜 인연의 끈을 더욱 질기게 만들며, 결혼을 하며 신부와 신랑이 나누는 합환주는 부부의 연을 다짐한다.

그 종류도 다양하다. 서양은 과일주가, 우리 사회는 곡주가 발달했다. 여름에 빚는 이화주, 새벽에 익는 계명주, 꽃으로 향기를 낸 가향주, 약재를 넣어 만든 약주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투명한 병에 담겨 찰랑거리는 그 미물(美物)은 오랫동안 인간의 역사에 녹아왔다.

술은 숙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거칠고 단순한 맛이 부드럽고 온화한 맛으로 변화하고, 향도 더욱 은은하니 깊어진다. 이렇게 숙성을 거쳐 완성된 술은 각각 다른 병에 담겨 보관된다. 우아한 느낌의 와인은 고풍스런 병에, 하얗고 속을 알 수 없는 막걸리는 탁한 병에, 탁 하고 청량감을 안겨주는 맥주는 시원한 병에, 각자 고유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숙성되어온 우리의 내면도 각자 그에 걸맞게 빚어진 몸에 담겨 있는 것은 술과 다르지 아니하다. 올해로 한국 나이 스물넷이다. 많지만 어린 나이다. 사회 초년생, 학생, 직장인, 자유와 도전의 나이이다. 하지만 이십의 중반에 들어서면서 의문이 생긴다. 93년산이라는 라벨지가 붙여진 내가 과연 그에 걸맞는 숙성도를 갖췄는가?

‘넌 사회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냉정한 사회는 도태되는 순간 끝이라 경고하며 지금의 노력보다 더 많은 노력을 강조한다. 나는 나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어느 순간 내 성실함은 남과 비교되어 게으름이 되고 만다. 나는 정말 게으른 것일까?

우리 사회는 프롤레타리아를 경멸한다. 그들에게 무능력하다는 낙인을 찍고, 노력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로 치부해버린다. 어느 순간 청년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을 끔찍이 두려워했다. 사회에 의해 매도되는 것이 두려워, 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프롤레타리아가 되지 않기 위해, 서로의 것을 경쟁하기 시작했다.

내 병에 많은 라벨이 붙을수록 더 가치 있게 평가 받으리라 여기며 병꾸미기에만 집중하는 현 세대들이 과연 속 사람이 그만큼 숙성되어 있는지 걱정이다. 이에 한국은 전국적으로 인성교육에 집중하고 있는 추세이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만들어진 물질 만능주의는 현 세대의 병리적인 현상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방법이지만, 과연 효과가 있을 지 걱정이다. 여타 다른 정책처럼 돌려 막기 식으로 인성을 가르친다면, 한국사회의 병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바쁘게 달려온 청년들에게는 오히려 휴식이 필요하다. 정체성과 가치관을 굳건히 다져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말이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술병, 분위기 있는 바의 비싼 술보다 낡고 오래되어 보잘것없는 술병이라도 그 속에 품고 있는 가치를 알아 볼 수 있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숙성되어 흉내 낼 수 없는 향과 풍미를 가진 술은 누구에게나 환영 받지 않겠는가.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임을 깨닫도록 현 청년 세대는 다시 한번 올바르게 숙성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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