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바이올리니스트 김광훈의 클래식 세상만사] 바이올리니스트는 행복하다. 아무리 많은 곡을 배우고 연주해도 평생 익혀야 할 곡이 (그것도 주요한 곡들이) 넘쳐나니 지루할 틈이 없어 행복하다.

바이올리니스트는 불행하다. 이제는 ‘웬만큼’ 레퍼토리가 구축 되었겠지...하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해야 할 곡과 넓혀야 할 레퍼토리가 부지기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피아니스트를 곁에 두고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것이 조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현악 연주자들 중에서는 가장 넓은 바다를(다르게 표현한다면 망망대해를) 헤엄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무반주 바이올린 곡을 언급했을 때 혹자는 파가니니 카프리스나 이자이 전곡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바흐의 6개의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바이올린 소나타를 이야기할 때 모차르트나 브람스 등을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바이올리니스트가 뛰어넘어야 할 에베레스트로 대개 베토벤이 창조한 10개의 견고한 구조물을 이야기한다. 초기작임에도 1번 2악장의 아름다움은 그 짝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혹적이다. 2번의 간소함과 3번의 즐거움은 또 어떠한가? 4번에 녹아있는 베토벤 특유의 에스프리와 유명한 5번의 정취, 그리고 알렉산더 1세 황제에게 헌정된 주옥같은 6번부터 8번까지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우리는 어느덧 베토벤이 보여주는 산과 들, 바다와 실개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만다. 협주곡과도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9번이 끝나면 우리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듯 최고의 미를 자랑하는 10번 소나타를 맞이하게 되며 이 아름답고 장엄한 사이클은 마침내 오롯한, 그리고 온전한 완성에 이른다.

이 사이클에 도전한 수많은 연주자들 중 음반 상으로 전곡 녹음을 남기고 있는 몇몇 연주자들에 대해 살펴보자.

▲ 요제프 시게티-유튜브 화면 갭처

우선 요제프 시게티와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음반을 거론하고 싶다. 현대의 뛰어난 연주들이 많지만 시게티의 녹음은 그의 다른 연주들이 그렇듯 특유의 역사성과 통찰력으로 승부하는 음반이다.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함께 요제프 시게티의 숨겨진 최고의 명연주 중 하나인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유일한 전곡 녹음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 미국 워싱턴의 의회 도서관에서 열린 세 번의 리사이틀 연주에서 전곡을 연주했고, 당시 실황연주가 지금의 음반이 되었다. 이 음반에서 두 연주자는 열정, 표현력, 그리고 음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설파하고 있다.

볼프강 슈나이더한과 빌헬름 켐프의 연주를 살펴보자. 고전적이면서 깨끗한 어법을 가지고 있는 켐프의 피아니즘을 발판삼아 슈나이더한은 특유의 남성적 매력을 과시하는 연주를 들려준다. 시게티의 연주와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오래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이들이 극단적인 피아노와 포르테의 대비에 몰두하지 않으면서도 차분히 들려주는 음악에는 설득 이상의 설득이 존재한다.

많은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 듀오가 있지만 우리들의 뇌리에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클라라 하스킬의 듀오만큼 각인되어 있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둘 다 공히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라는 별칭에 걸맞게 투명하고 호소력 있는 음색, 그리고 정갈한 방향성을 바탕으로 이미 모차르트 소나타에서 이상적인 호흡을 과시한 바 있다. 확실히 그뤼미오의 매력이라면 그 재료가 무엇이던 간에 특유의 ‘프랑코 벨기안’ 스타일(당시 시대적 분위기로는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을 바탕으로 재료 특유의 향취를 잃지 않으면서도 노련한 해석을 곁들이며 설득력을 높인다는 점이다. 그것이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건, 아니면 바흐 무반주이건 혹은 파가니니 작품이건 그 어떤 시대에도 걸맞은 느낌을 부여할 줄 아는 대가다. 그뤼미오에 대해 모차르트에서 받았던 인상만을 단편적으로 간직한 이들이라면 그뤼미오가 연주하는 베토벤 현악 삼중주 음반 혹은 본 작인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반은 그뤼미오의 ‘또 다른’ 스타일을 확인하기에 좋은 예이다. 하스킬과의 환상적인 호흡을 바탕으로 특유의 낭랑한 음성으로 전곡을 꿰뚫는 거시적 관점과 편안한 해석은 ‘역시 그뤼미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헨릭 쉐링과 잉그리드 해블러는 특유의 옹골찬 사운드와 따뜻한 음색으로 앞의 두 연주자에 비해 (심지어) 녹음 기술이 더 뛰어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마이크 전면에 나선 듯한’ 사운드가 특히 돋보인다. 하스킬과 마찬가지로(혹은 다른 방향에서) 역시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인 피아니스트 해블러를 대동한 쉐링은 특유의 신사답고 지적이면서도 담백한 해석을 드러내고 있다. 거대한 스케일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구조적 아름다움’를 중시했던 고전시대, 그 시대에서도 최고였던, 베토벤의 음악을 ‘반복감상’ 했을 때 즐거움을 얻고 나아가 무엇보다도 쉬 지루해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쉐링과 해블러의 연주는 최상의 선택이다.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유튜브 화면 캡처

음색만 놓고 본다면 아이작 스턴의 녹음도 필자의 뇌리를 언뜻 스칠 정도로 스턴의 녹음 역시 음색적인 장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레프 오보린의 음반을 뛰어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필자는 오이스트라흐의 5번 소나타를 들었을 때의 (그의 따뜻한 음색과 해석에서 느끼는) 전율과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상적이고도 긴 호흡의 연주, 윤기 흐르는 자연스러운 바이올린 음색, 베토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통찰하는 능력, 여기에 더한 오보린의 환상적인 피아니즘…….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은 미덕이 이들의 연주에 있다. 오이스트라흐에 대한 피아니스트 리히터의 평을 소개한다.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어보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오이스트라흐)가 가장 훌륭했다. 그에게는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음색과 일체의 긴장이 배제된 힘이 있었다. 그는 연주를 하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바이올린은 완전히 몸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빌헬름 켐프는 예후디 메뉴인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추며 전곡 반을 남긴다. 켐프의 연주는 여전히 건재하며 여기에 더해진 메뉴인 특유의 통찰력은 볼프강 슈나이더한과의 조합과는 또 다른 매력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메뉴인의 연주가 망가졌다는 둥 운궁이 거칠다는 둥 왜 좋은지 모르겠다는 둥 평가가 분분하지만 곡을 분석하는 메뉴인의 방식과 이를 해석해 내는 방법은 누가 뭐라고 해도 거장의 것이다.

근대 혹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음반은 이착 펄만과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녹음이다. 너무나 쉽게, 유태인 특유의 낭랑함과 천연덕스러움으로 연주된 본 음반은 아마 이제까지 언급한 음반들 중 가장 대중 지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음반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이들의 예술성을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쉽다는 것이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난해한 대상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나긋함과 화사함’이 있다면, 이것은 최고의 미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오귀스탱 뒤메이-유튜브 화면 캡처

오귀스탱 뒤메이와 마리아 후앙 피레스의 녹음은 무려 4년이 넘게 걸려 완성되었다. 뒤메이의 연주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열정’ 그 자체다. 특정 악장(예컨대 1번 2악장)에서 발휘되는 그만의 개성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해석은 가히 최고다. 전체적인 고른 완성도와 해석의 충실성에 이견을 가진 이들도 있겠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가는 길을 남다르게 간다는 점과 남성적 패기의 관점 등을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음반은 필청 음반 중 하나다.

기돈 크레머와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음반은 결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설혹 그것이 정규 궤도에서 아주 많이 벗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에 비하면 뒤메이의 연주는 얌전하다 싶을 정도로 크레머는 특유의 극명한 포르테와 피아노의 대비,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아로새김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안네-소피 무터와 램버트 오르키스의 연주. 주관적인, 너무나 주관적이면서도 끝없이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녹음이다. 일견 ‘작위적이다’라고 폄하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나 비록 그것이 베토벤에서 상당히 벗어났다 할지라도(베토벤에 기반을 둔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는 크레머나 뒤메이와는 다르다) 무터 특유의 카리스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라면 권할 만한 음반이다.

▲ 바이올리니스트 김광훈 교수

[김광훈 교수]
독일 뮌헨 국립 음대 디플롬(Diplom) 졸업
독일 마인츠 국립 음대 연주학 박사 졸업
현)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 정단원
가천대학교 음악대학 겸임 교수
전주 시립 교향악단 객원 악장
월간 스트링 & 보우 및 스트라드 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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